마가복음 8장 1~21절

더보기

사천 명을 먹이시다(마 15:32-39)
1   그 무렵에 또 큰 무리가 있어 먹을 것이 없는지라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2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그들이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 지났으나 먹을 것이 없도다
3   만일 내가 그들을 굶겨 집으로 보내면 길에서 기진하리라 그 중에는 멀리서 온 사람들도 있느니라
4   제자들이 대답하되 이 광야 어디서 떡을 얻어 이 사람들로 배부르게 할 수 있으리이까
5   예수께서 물으시되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느냐 이르되 일곱이로소이다 하거늘
6   예수께서 무리를 명하여 땅에 1)앉게 하시고 떡 일곱 개를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나누어 주게 하시니 제자들이 무리에게 나누어 주더라
7   또 작은 생선 두어 마리가 있는지라 이에 축복하시고 명하사 이것도 나누어 주게 하시니
8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 일곱 광주리를 거두었으며
9   사람은 약 사천 명이었더라 예수께서 그들을 흩어 보내시고
10   곧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사 달마누다 지방으로 가시니라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마 16:1-4)
11   바리새인들이 나와서 예수를 힐난하며 그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2)표적을 구하거늘
12   예수께서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시며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 세대가 2)표적을 구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세대에 2)표적을 주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13   그들을 떠나 다시 배에 올라 건너편으로 가시니라

바리새인들과 헤롯의 누룩(마 16:5-12)
14   제자들이 떡 가져오기를 잊었으매 배에 떡 한 개밖에 그들에게 없더라
15   예수께서 경고하여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16   제자들이 서로 수군거리기를 3)이는 우리에게 떡이 없음이로다 하거늘
17   예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 떡이 없음으로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
18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하지 못하느냐
19   내가 떡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바구니를 거두었더냐 이르되 열둘이니이다
20   또 일곱 개를 사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광주리를 거두었더냐 이르되 일곱이니이다
21   이르시되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하시니라

어노인팅 때 들었던 말씀이 기억이 난다.

이스라엘 역사 중 가장 하나님을 많이, 멀리 떠나있던 두 시기가 있었는데,

하나는 출애굽 시대, 두번째는 예수님의 초림기

둘 모두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많은 기적이 일어났던 시기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하나님을 멀리했던 시기이기도하다.

 

비현실적인 현상들을 경험한다고 해서 주님에 대한 확신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역사적으로 봤을 때 가장 거역하는 모습을 많이 관찰 할 수 있다.

아이들에게도 이쁘다고 독이든 약이든 바라는걸 다 들어주고 키우게 되면 오히려 엇나가는 모습과 흡사하다는 생각도 든다.

눈앞에서 오병이어와 칠병이어의 기적을 경험을 했으나 돌아서고나면 또 잊고 현실을 불안해하는 제자들의 모습은 글로만 읽었을 땐 '저렇게까지 큰 경험까지 해놓고 왜 또....' 싶은데 현실의 나에게도 별반 다르지 않는 모습들이 간혹 나오기도한다.

주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가지고 난 후에 교회를 나서는 순간부터 현실의 걱정들로 걸려 넘어지면서 또 다시 현생과의 갈등이 시작이 되는 것 처럼...


기도

주님이 우리의 변한 모습을 돌아보게하시고 그 자리에서 돌이키사 주님께로 다시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변한 모습을 질타하시기보다 그 자리에서 아파하고있는 우리의 모습을 끌어안아 위로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조금전에 은혜의 경험을 하고서 돌아서고나면 또 다시 세상과 타협할 것을 알고계셨고 그런 모습마저도 사랑하셨습니다. 그저 주님의 자녀라는 이유만으로...

그래요 우리는 인간의 옷을 입고 인간이라는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평생 죄와 싸워야하는 인간입니다.

하지만 주님이 우리와 함께하시어 우리의 칼과 방패가 되어주시고 용기가 되어주셔서 기꺼이 싸울 힘을 주십니다.

우리를 끊임없이 빛 가운데로 나아가 주님앞에서 나 자신을 비춤으로 나의 아픈 모습을 주님앞에 치유받고 힘을 얻어 세상으로부터 꿀리지않고 강건하게 싸워나갈 힘과 용기를 주세요.

마가복음 7장 24~37절

더보기

수로보니게 여자의 믿음(마 15:21-28)
24   예수께서 일어나사 거기를 떠나 두로 지방으로 가서 한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 하나 숨길 수 없더라
25   이에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곧 와서 그 발 아래에 엎드리니
26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내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27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28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29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시매
30   여자가 집에 돌아가 본즉 아이가 침상에 누웠고 귀신이 나갔더라

귀 먹고 말 더듬는 사람을 고치시다
31   예수께서 다시 두로 지방에서 나와 시돈을 지나고 데가볼리 지방을 통과하여 갈릴리 호수에 이르시매
32   사람들이 귀 먹고 말 더듬는 자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안수하여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33   예수께서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사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34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라
35   그의 귀가 열리고 혀가 맺힌 것이 곧 풀려 말이 분명하여졌더라
36   예수께서 그들에게 경고하사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되 경고하실수록 그들이 더욱 널리 전파하니
37   사람들이 심히 놀라 이르되 그가 모든 것을 잘하였도다 못 듣는 사람도 듣게 하고 말 못하는 사람도 말하게 한다 하니라

오늘은 두가지의 사건을 보여주신다.

첫번째는 좀 간단하지만 넙죽 엎드리는 절박함과 겸손함을 보인 어느 귀신들린 딸을 둔 '엄마 이야기'

두번째는 비교적 복잡한 귀먹고 말더듬는 자의 치유의 사건

 

첫번째 : 귀신 들린 딸을 둔 엄마의 절박함

은혜는 배고픈 자의 것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복이있다는것

정확히 나의 해석으로 돌려 표현을 하자면 주님이 주시는 은혜는 자신이 심령이 가난한 것을 알고있는 자의 것

그렇다고해서 우리가 간곡히 부탁했을때만 은혜를 부어주시는 것은 아니다.

은혜는 우리삶의 패시브처럼 항상 부어주시고 계신다. 우리 삶 속의 산소처럼 너무 익숙해서 알아 차리지 못하는 것이 대부분일뿐.

자신이 은혜에 목이 마르다는 것을 알고 그것을 간곡히 요청했을 때 '그것이 은혜다.'라고 알려주신다.

물론 오늘의 본문은 좀 특별한 은혜를 요청하고있다.

 

이방 그리스인의 여인이 자신의 딸을 귀신에게서 해방시켜달라는 간곡한 부탁을 한다.

"예수님 제 딸에게서 귀신을 쫒아내어 주세요 제 딸이 많이 아파합니다."

"자녀로 먼저 베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네 알고있습니다. 집에서 키우는 개들도 주인집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습니다. 저에게 그 부스러기라도 허락해주세요"

더보기

개인적으로 이해하기쉽게 재해석을 하게된다.

"주님 우리에게도 밥 좀 주세요"

"미안하다. 이 밥은 우리식구들을 위한 것이다."

"네 암요 당연하죠 제가 그 밥그릇을 뺏겠다는 것이 아니라 혹여 먹고 남는것이 있다면 그것으로도 감사히 받겠습니다."

"네 믿음이 내게 족하다"

주님께서는 이 여인의 은혜에 대한 (자신을 개로 비유할 정도의) 겸손함과 간절함을 보셨다.

그정도로 자신의 자존심을 굽히는 일이라면 역시 엄마라서 가능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정말 허무맹랑한 소문에도 자신의 자존심을 굽히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정말 그만한 절박함을 보인것이다.

은혜에 대한 목마름이 그만큼 간절했을것이다.

 

두번째 : 귀먹고 말더듬는 자의 굳이?스러운 주님의 치유의 역사

이 사건에대해서는 두가지 의문점이 생긴다.

이 직전 사건에서는 굳이 행차하지않아도, 눈앞에 있지 않아도 치유의 역사를 보여주셨다.

그런데 이번 사건에서는 주님께서 굳이 자신의 두 손을 이용하시고, 침을 이용하셨다.

그 귀 먹은 자의 믿음이 부족해서일까?

아마도 그에겐 예수님에 대해서 들을 수 있었던 것은 아무것도 없었던 것을 이해하셨던 탓일까?

가장 합리적인 생각은 예수님께서 "너의 죄가 사하였다."라거나, "말을 해봐라"라는 그 말조차도 들을 수 없는 귀 먹은 자의 적절한 처방전을 행하셨던것으로 생각이 된다.

 

그 사람은 듣지못한다고해서 외톨이는 아니었다.

그 사람이 낫기를 바라는 마음에 사람들이 그 사람을 예수앞에 데려다 놨으니..

좀 풀리지않는  의문점들.

또 주님께서 다른사람들에게 말하지 말라고 했지만 이 귀 먹은 자는 망설이지 않고 소문을 낸다.

아니 그럴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주변 사람들이 귀 먹었던 자가 전혀 다른사람처럼 잘 듣고, 잘 말하는 모습을 보고 어찌 된 일인지 안 물어볼 수 없었을 테고 너무나 신난 이 사람의 마음으로는 이 사건을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었을테니 당연히 예수님이 말하지 말라고 하셨던 경고는 안중에도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될것을 모르진 않으셨겠지. 아시는것에도 불구하고 그 사건을 행하셨겠지.

그걸 알면서도 굳이 그 자에게 경고하셨던 것은....그렇다고 경고 안할수는 없고 하시기는 하셔야하셨겠지.

왜 굳이 경고를 하셨어야했을까...

밝혀지면 안되는 사건이었다면 굳이 꼭 행하셔야할 사건이었을까..

 보이셔야하셨던 사건을 이루신 것일까..

아니면 단순히 그 자가 안타까워서 행하신 사건일까..

 

풀리지않는 의문점으로 생각이 많아진다. 

 

주님 저에게는 아직까지 예수님의 의도를 해석하기에는 너무나 어리석고 모르는부분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반드시 우리를 선한곳으로 인도하여주실 그 주님의 선하심과 우릴 향한 사랑을 믿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선한길로, 건강한길로, 좋은길로, 아름다운 곳으로 인도하여 주실 것을 믿고 의지합니다.

우리가 겸손한 마음으로 심령이 가난한자라는것을 잊지 않고 그 마음으로 주님앞에 엎드려 은혜를 간청하는 마음을 잊지않게 해주세요

죄인을 위하여 이땅에 오신 예수님. 우리는 병자이고, 죄인임을 잊지않게 해주세요.

교만한 마음으로 주님을 외면하고, 제 마음이 주님으로부터 떠나지 않고 은혜를 계속 갈급해하는 마음을 허락해주세요.

저의 어리고 어리석은 마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주님이 이 어리석은 마음을 이끌어주심으로 우리에게 더 큰 은혜를 허락해주세요

 

 

하루가 멀다하고 반찬투정이 일상이었다.

엄마에게 반찬이 이게 뭐냐고

왜 고기반찬은 없냐고

나는 토끼가 아닌데 엄마는 맨날 풀만 먹인다고

그렇다고 해서 엄마는 나에게 고기반찬을 내줄 순 없었을 것이다.

누구보다 내가 건강했으면 하는 마음에서

그걸 알면서도 마지막까지도 투정부렸다.

"제발 고기반찬도 같이 해주면안돼?"

 

그렇게 독립을 결심했다.

독립하고나면 매일의 양식은 내가 고를 수 있고, 매일 고기반찬을 먹을 수 있으니까.

처음엔 누군가의 빈자리가, 더이상 보이지 않는 간섭이, 그 자유로움이 마냥 행복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평생을 혼자서 행복하게 살 수 있을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다가 혼자 있는 시간에 주변이 고요해져 생각에 잠길때면

누군가의 빈자리가 허전해보이고, 보이지 않던 노동이 미안해졌다.

그렇게도 밉던 풀떼기 반찬들이 그리워졌다.

우리를 키워낸 눈물이, 조금이라도 더 해주려는 땀방울이, 잘못했을 땐 건네준 위로가,

사고쳤을 땐 모든 일을 제쳐두고 달려와 나를 걱정하던 그 모습이...

 

대부분의 깨달음은 늦게 찾아오고 그 깨달음과 함께 후회도 같이 밀려온다.

이 늦은 후회를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분은 나를 아무말없이 꼬옥... 껴안아주셨다.

그리고 한참후에 한마디 꺼내셨다.

"고생많았다...기다리고있었다"

 

더보기

매일같이 사랑을 부어주시는 주님

그리고 저는 그 사랑을 매일같이 투정부렸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랑이 아니라고...

"주님 이거말고 저거라고 몇번을 말해요"

하지만 주님은 그당시 그것이 제게 독이될것을 알고계셨습니다.

"아가야 모든것은 때가 있는 것이란다. 조금만 참고 기다려주겠니?"

"아 몰라요 안먹을래요"

이런 싸가지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여전히 나에게 사랑을 부어주십니다.

내가 보이던, 보이지않던.... 그 모든 사랑이 은혜입니다.

그리고 지금 그것을 새삼 깨닫습니다.

 

주님의 그 은혜를... 그 사랑을 산소와 같이 생각하는것이 아니라

그 산소마저도 사랑으로 여기는 시선을 꾸준하게 유지하고싶습니다.

'은혜의 발걸음 > 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쉽게 놓지 못했던 2018  (0) 2022.06.06
나는 인간,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자가  (0) 2022.06.03
새장 속에 갖힌 주인  (0) 2022.06.03
죄, 스키타는 것처럼  (0) 2022.06.01
작고 소중했던 나의 믿음  (0) 2022.05.23

더보기

안식일에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시다(마 12:9-14; 눅 6:6-11)
1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쪽 손 마른 사람이 거기 있는지라
2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주시하고 있거늘
3 예수께서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한 가운데에 일어서라 하시고
4 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그들이 잠잠하거늘
5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탄식하사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 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
6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니라

많은 무리가 나아오다
7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바다로 물러가시니 갈릴리에서 큰 무리가 따르며
8 유대와 예루살렘과 이두매와 요단 강 건너편과 또 두로와 시돈 근처에서 많은 무리가 그가 하신 큰 일을 듣고 나아오는지라
9 예수께서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작은 배를 대기하도록 제자들에게 명하셨으니
10 이는 많은 사람을 고치셨으므로 병으로 고생하는 자들이 예수를 만지고자 하여 몰려왔음이더라
11 더러운 귀신들도 어느 때든지 예수를 보면 그 앞에 엎드려 부르짖어 이르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하니
12 예수께서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고 많이 경고하시니라

열두 제자를 세우시다(마 10:1-4; 눅 6:12-16)
13 또 산에 오르사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14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15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러라
16 이 열둘을 세우셨으니 시몬에게는 베드로란 이름을 더하셨고
17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이니 이 둘에게는 보아너게 곧 우레의 아들이란 이름을 더하셨으며
18 안드레와 빌립과 바돌로매와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및 다대오와 1)가나나인 시몬이며
19 가룟 유다니 이는 예수를 판 자더라

1.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이 사건은 이전 큐티의 본문 마가복음 12장 1-8절의 내용(안식일에 밀 이삭을 자르다)과 매칭이 된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이삭을 자르는 모습을 바리새인들이 보고는 예수님에게 시비를 걸었던 그 사건.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지적을 듣고도 여전히 정신을 못 차려 또다시 안식일에 사람을 치유하는 일 가지고 시비를 걸고 있는 것이다.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 하셨던 것의 주님의 정확한 의미를 분별하고, 그 의도에 맞게 순종해야 할진대
바리새인들은 그것을 자신들 나름의 논리를 적용하고, 그것에 따르지 않으면 시비 트는 것이다.
무엇을 위한 안식일인지 자신들의 권력을 위하여 자신들의 논리로 변질시켜버린 것이다.
마치 이번 주 주일에 교회 가지 않으면 당장 지옥에라도 떨어질 것처럼 인식이 변질되어버린 우리들의 신앙 같다.

주님의 말씀과 인도하심에 내 나름의 논리를 적용시키는 것이 아니라 혼자 멋대로 생각하고 결정 내리는 것이 아니라
한 번 더 주님의 뜻을 구하고 주님의 시선과 말씀을 기반으로 주님의 의도를 파악하자.

2.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쪽 손 마른 사람이 거기 있는지라
손 마른 사람은 정말 부지런히 회당을 다녔던 것이다.
누구 하나 자신에게 눈길주는 사람 하나 없어도 자신의 기대와 고집을 가지고 언젠가 치유될 그날을 기대하며.
이 모습은 왜 꼭 날 보는 것같이 불쌍하게 느껴질까...
누구 하나 나에게 신경 쓰지 않아도 말 한번 걸어주지 않아도 꿋꿋하게 나의 할 일을 하며 걸어왔던....

다른 점이 있다면 이 사람은 마음속에 포기하지 않는 기대와 소망이 있었다.
그리고 그 기대를 포기하지 않고 꾸준하게 부지런히 자신만의 제사를 지낸 것이다.
그것이 그 사람의 꿈이자 절박한 희망이었겠지

나는 언젠가부터 그런 꿈을 포기한 채 미련을 버리고 있었다.
내 욕심이라며 내 욕심은 들어주지 않으시겠지... 하는 생각으로 혼자 멋대로 판단하고 버리며 살아왔다.
내 필요를 내려놓고 주님께 집중하라는 것은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떠나서 그냥 주님께 집중하라는 것이었는데..
내 욕심인 것을 떠나서 내가 주님께 집중하고, 그것이 나를 더 좋게 이끌어준다면 주님이 알아서 주실 것을
나는 안 들어주실 수도 있으니까 일찌감치 체념하고 다닌 것이다.
그런 영혼이 없으니 열정마저도 식었을 테고 애초에 믿음이라는 것 자체가 성립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더보기

계속해서 혼자의 시간을 보내게 해주시는 주님께 다시금 집중합니다.

내가 필요한 것을 포기하는 것이아니라

그것이 필요하지만 그것을 뒤로하고 그냥 주님께 집중합니다.

주님이 나에게 하시고자 하는 말씀에 집중합니다.

이끄실 곳으로 나를 이끄시고, 그곳으로 이끄시는 주님의 뜻을 정확히 분별하는 시선을 갖게 해주세요

주님의 말씀을 함부로 판단하고 결정해버리고 포기해버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시선으로 다시금 생각해보고 주님의 뜻을 구할 수 있도록 해주세요

마가복음 2장 13~28절

더보기

레위를 부르시다(마 9:9-13; 눅 5:27-32)

13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 나가시매 큰 무리가 나왔거늘 예수께서 그들을 가르치시니라

14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15 그의 집에 2)앉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3)앉았으니 이는 그러한 사람들이 많이 있어서 예수를 따름이러라

16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 및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17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금식 논쟁(마 9:14-17; 눅 5:33-39)

18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하고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말하되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19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느니라

20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21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기운 새 것이 낡은 그것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되느니라

22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자르다(마 12:1-8; 눅 6:1-5)

23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새 그의 제자들이 길을 열며 이삭을 자르니

24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말하되 보시오 저들이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

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다윗이 자기와 및 함께 한 자들이 먹을 것이 없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26 그가 아비아달 대제사장 때에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고 함께 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

27 또 이르시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28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1.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우리는 아프다는 것을 매우 인정하기가 힘든 마음을 갖고 살아가고있다.

그것이 육체적이건, 심리적이건.

육신이 병들었다는 것을 알았을 땐 매우 우울하거나, 발악을 하기도한다.

설령 그렇다하더라도 차라리 육신이 아픈 것이 났다. 

심리적으로 아프다는 것은 더더욱 알아채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특히 스스로 인지하기는 기적이자 축복과도 가까운 일이다. 더욱이 우리 한국이라는 나라는 심리적으로 아프다고하면 '내가 뭔가 이상한사람인가?'하는 자신의 가치를 무너뜨리면서 더더욱 인정하기가 힘든 시대이다. 결코 이상하지 않은데.... 그렇게 생각하는 내 자신이 가끔은 불쌍하기도 하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에게 '병든 자'를 비유하시며 죄인을 위하여 온 것이라고 하셨다.

자신이 죄인이라고 인정하는 일은 심리적인 아픔을 인정하는 것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그것보다 더 어려운 마음일지도 모른다.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는 일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고, 그것은 자신의 치부가 드러나는 일로 생각하니까. 그러니 '자신을 죄인임을 인정하라'는 말이 당연히 거부감이 드는 일이고, 어쩌면 반감을 사게 되는 말이기도 하다. 

 

그런데 주님은 과감하게 바리새인들에게 그 말을 던진다.

현시대적으론 새파랏게 어린 청년이 꼰대에게 싸움거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정확하겐 꼰대가 먼저 딴지(?) 시비(?)를 걸었지만..)

 

주님은 의인이 아니라 죄인에게 관심이 있음을 분명하게 표현하고 싶으셨던게 아닐까

그리고 그 죄인들에게 위로를 주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너와 내가 함께하겠다."

사회적으로 박해 받는 세리와 죄인들.

그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함께하는 것.

그러니 자신이 죄인임을 망설이지말고 인정함으로써 나아오라는 분명한 사인이 되지않았을까.

그리고 바리새인들에게까지도 그런 메세지를 담아 말씀을 하셨던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들을 귀가 있는 자들에게만 들렸을 메세지겠지?

 

죄앞에서 누구보다 냉정하게 자신을 바라보고, 솔직해져야함을 잊지말자.

 

2.허물을 벗은 신앙 :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기운 새 것이 낡은 그것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되느니라

낡은 옷을 아무리 새로운 천으로 덧대도 그 낡은 것은 가려질뿐 없어지지 않는다.

아무리 겉으로 '척'을 해봐도 민낯을 드러나게 되면 그 낡은 모습들, 죄의 모습들이 다 드러날것이고,

그게 아니더라도 눈썰미 좋은사람들에게는 가리는 것 자체부터 의미없는 것이다. 

결국엔 허영심 가득한 허세, 속빈 강정일 뿐인 것이고, 아무리 감춰봐야 얼마 지나지않아 그 실체가 드러나게 될것이다.

 

또 새 것이 낡은 그것을 당기어 헤어짐이 더하게 된다는 것은 아무리 자신의 낡은 모습을 감춰 속인다 하더라도

그 속임으로 인해 또다른 낡음을 낳게 되는 말씀임을 깨닫게 하신다.

결국에 아무리 열심히 철저하게 '척'을 해봐야 결국에 실체는 드러나게 되어있고,

누군가가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결국에 그 '척'들로 인하여 민낯이 드러나게 되어있음을 뜻한다.

 

나에게, 주님에게 솔직해야함을 잊지 않아야할것이다.

'척'하지 않는 솔직한 신앙을 간직하자.

 

3.본질 바로잡기 :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시험을 칠때는 출제자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해야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매순간 시험의 연속이다.

우리는 모든 상황과 모든 말씀속에 숨어있는 주님의 의도를 파악해야한다.

하지만 우리는 매순간 잊게되고, 그로 인하여 자꾸만 본질(주님의 의도)를 놓치며 살게된다.

주님이 주시는 시험의 의도를 바로 알게 되는 순간 그 시험의 공략법을 파악하게 되고, 더욱 주님을 의지하고 믿게된다.

 

어려운 시험을 격는다고해서 주님을 원망하기보다 먼저 주님의 의중을 여쭙는 시간을 가져보도록 하자.

주님의 의중 속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과 성장을 발견 할 수 있을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찾게 된다면 우리는 더욱 강인해지고, 더욱 자유로워지고, 더욱 기뻐하는 삶을 살게 될것을 믿는다.

 

더보기

주님앞에서 무엇을 감출수 있을까요

모든것을 다 아시고 모든것을 다 꿰뚫고 보시고 다 보고계시는 분인데 감추려는 것 자체가 부끄럽습니다.

하지만 저는 인간으로써 또 자꾸만 아담과 하와처럼 숨으려 하고, 감추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 모든 죄악을 드러내시는 주님

그 죄를 빛가운데로 드러내시고 죄를 태워 나를 다시금 주님앞으로 인도하셨습니다.

나의 수치와 부끄러움을 드러내시고, 태우시고 주님앞으로 다시 나아올수 있게 되었음에 감사드립니다.

 

저의 인간의 본성에 의하여 다시 '척'하지 않는 신앙이 될거라고는 확신치 않고 오히려 저 자신을 믿기가 힘듭니다.

하지만 주님을 의지함으로 이겨나갈 수 있는것을 체험할 수 있었고, 이것을 잊지 않고 끝까지 의지할 수 있도록 주님께서 도와주세요.

솔직하지 않고 자꾸만 숨으려는 나 자신을 주님앞에 무릎 꿇려놓고 회개합니다.

오직 빛이신 주님을 바라봅니다.

 

매순간 주님이 주시는 시험 속에 주님의 의중을 여쭙고 참된 본질을 찾으며 주님을 의지하는 그런 신앙이 되게하시고, 그로 인해서 자꾸만 죄성이 올라와 감추려는 저 자신을 깨우치심으로 다시금 죄악가운데로 가지 않도록 주님께서 인도하여주세요.

 

감사합니다 주님.

난 예수를 믿어

그리고 인간이야

너네들과 다를거 없는 그냥 평범하지만 다른, 같은 하늘아래에 살아가는 한낱 인간.

 

어느날 친구가 나에게 물어봤어

"야 너네는 죄안짓고사냐?"

처음엔 이걸 왜물어보나싶었어

"왜 안짓고살겠냐 ㅋㅋ 나도 인간이야"

한참지나고나서 또 죄를 지었다는것을 깨닫고난 후의 나의 모습을 보면서 그 질문의 의도를 깨달았어

"니네는 뭐 다르냐?"

 

맨날 '거룩'을 외치면서 세상과는 다른 죄의 기준을 들먹이며 미련하고 답답하게 살아가는 나에 대한 호기심이었을거야

'왜 저렇게까지 피곤하게 살지?'라는 마음도 있었겠지

뭐... 예수를 모르는 사람들이 가장 납득하기 쉽게 설명을 하자면

나는 지금까지 이렇게 살아왔고, 지금까지 살아온것처럼 앞으로도 이렇게 살아가는게 덜 피곤해.

이렇게 살아온 나에겐 이게 더 익숙하거든.

맨날 풀만 먹는 초식동물에게 고기는 관심이 없는것 처럼.

미련하다고 할 수 있어. 하지만 나에게 이것이 내 건강의 방식이고, 살아가는 방식인거지

 

이젠 나는 이렇게 대답할거같아

"나도 니네처럼 팔다리 붙어있고 눈코입 붙어있는 인간이야 ㅋㅋㅋㅋ 다를거없고 나도 죄지으며 살어,
 그럼 넌 궁금할거야 뭐가 다른건지. 니네시선에서는 죄가 아닌데 괜히 죄로 만들어서 피곤하게 사는거 아니냐고

 뭐....그런걸수도있겠지 하지만 내가 봐온 선배들은 하나같이 이런 삶의 방식을 통해서 건강하고 강인한 멘탈갖고 있더라

알고보니 그 건강과 강인함은 예수였어.  난 그런 건강과 강인을 배우고싶어. 그외의 것들은... 내시선에선 매우 연약해보여

니 마음속에는 니가 있고 내 마음속엔 예수님이 계셔.

니가 진심으로 사랑하고 존경하는 분이 니네 집에 방문을 했는데 초라한 모습으로 모시고 싶겠어? 최고의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겠지 그러니까 실수하더라도 최선의 마음으로 예수님을 모시고있는 내마음을 꾸미는거야 그렇게 교제하려고"

 

난 인간이야

죄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그저 한낱 인간.

육신, 정욕, 물욕에서 벗어날 수 없는 그저 인간 한명.

그리고 나또한 매일 죄를 지으며 살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일도 죄로부터 멀어지는 훈련을 재도전할거야

실패할것을 뻔히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도전을 할거고

넘어질것을 당연히 알고있지만 또다시 부딪힐거야.

나는 죄 많은 인간이지만 죄가 많은 인간이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야

'은혜의 발걸음 > 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반찬투정, 사랑투정  (0) 2022.06.08
쉽게 놓지 못했던 2018  (0) 2022.06.06
새장 속에 갖힌 주인  (0) 2022.06.03
죄, 스키타는 것처럼  (0) 2022.06.01
작고 소중했던 나의 믿음  (0) 2022.05.23

우리는 언제나 우리의 '주님'을 우리 속에 가두곤한다.

매우 역설적이다.

우리를 이끄는 '주인'이자 우리를 계획하시고 돌보시는 '부모'인데 나의 울타리 속에 가두는 것이다.

우리가 바라는대로 미래를 계획하고, 그렇게 되지 않으면 실망하고 원망하고...

 

더 지나고나서 그 계획된 미래의 어긋남이 감사로 변한다면 그나마 다행일것이다.

하지만 계획의 어긋남은 실망과 원망으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느꼈다..

특히 그 시나리오에서 자신의 모습에 아직 미련이 남아서겠지.

그 미련을 버리고 현재에 만족한다면 더 아름다운 세상을 보게 될것이다.

 

인간의 시야는 매우 좁다. 그 인간이 경험하는 세상 또한 매우 좁다.

매우 제한된 영역 내에서 삶을 살아가고, 그 제한된 세상만을 경험하며 살아간다.

그러다보니 내가 보는 주님의 영역 또한 매우 좁아지는 것은 아닐까

더 큰 세상을 볼수록, 더 많은 경험을 할 수록 내가 볼 수 있는 주님의 영역은 더 넓어지겠지.

 

그렇게 멋대로 정의내리고 판단해버린 우리의 주님은 그 예상을 처참히 깨뜨리시곤 전혀 다른 시나리오의 전개를 펼치시곤 하신다.

 정말 교만중의 교만이다.

나의 주인, 나의 인도자라고 고백하면서 내가 주인이되려 하극상하는 꼴이라니...

물론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전혀 모르고 저질러버리는 짓이긴 하겠지만.

 

그렇게 새로운 꿈을 마음에 새긴다.

이런 교만을 범하지 않기 위해서...아니

더 큰 주님을 경험하고 그 주님과 더 깊은 교제를 하기 위해

더 큰 세상을 체험하고, 더 많은 경험을 내 인생에 담아야 할것이다.

더 큰 주님을, 더 많은 주님을 경험하러 세상으로 뻗어 나가자.

더 큰 세상을 체험하고, 더 많은 일을 경험하고,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 다른 시각의 세상을 엿보기도하고.

더 깊은 주님을 체험하자. 

 

함께 가자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