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2장 13~2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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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를 부르시다(마 9:9-13; 눅 5:27-32)

13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 나가시매 큰 무리가 나왔거늘 예수께서 그들을 가르치시니라

14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15 그의 집에 2)앉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3)앉았으니 이는 그러한 사람들이 많이 있어서 예수를 따름이러라

16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 및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17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금식 논쟁(마 9:14-17; 눅 5:33-39)

18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하고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말하되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19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느니라

20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21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기운 새 것이 낡은 그것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되느니라

22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자르다(마 12:1-8; 눅 6:1-5)

23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새 그의 제자들이 길을 열며 이삭을 자르니

24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말하되 보시오 저들이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

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다윗이 자기와 및 함께 한 자들이 먹을 것이 없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26 그가 아비아달 대제사장 때에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고 함께 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

27 또 이르시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28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1.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우리는 아프다는 것을 매우 인정하기가 힘든 마음을 갖고 살아가고있다.

그것이 육체적이건, 심리적이건.

육신이 병들었다는 것을 알았을 땐 매우 우울하거나, 발악을 하기도한다.

설령 그렇다하더라도 차라리 육신이 아픈 것이 났다. 

심리적으로 아프다는 것은 더더욱 알아채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특히 스스로 인지하기는 기적이자 축복과도 가까운 일이다. 더욱이 우리 한국이라는 나라는 심리적으로 아프다고하면 '내가 뭔가 이상한사람인가?'하는 자신의 가치를 무너뜨리면서 더더욱 인정하기가 힘든 시대이다. 결코 이상하지 않은데.... 그렇게 생각하는 내 자신이 가끔은 불쌍하기도 하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에게 '병든 자'를 비유하시며 죄인을 위하여 온 것이라고 하셨다.

자신이 죄인이라고 인정하는 일은 심리적인 아픔을 인정하는 것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그것보다 더 어려운 마음일지도 모른다.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는 일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고, 그것은 자신의 치부가 드러나는 일로 생각하니까. 그러니 '자신을 죄인임을 인정하라'는 말이 당연히 거부감이 드는 일이고, 어쩌면 반감을 사게 되는 말이기도 하다. 

 

그런데 주님은 과감하게 바리새인들에게 그 말을 던진다.

현시대적으론 새파랏게 어린 청년이 꼰대에게 싸움거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정확하겐 꼰대가 먼저 딴지(?) 시비(?)를 걸었지만..)

 

주님은 의인이 아니라 죄인에게 관심이 있음을 분명하게 표현하고 싶으셨던게 아닐까

그리고 그 죄인들에게 위로를 주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너와 내가 함께하겠다."

사회적으로 박해 받는 세리와 죄인들.

그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함께하는 것.

그러니 자신이 죄인임을 망설이지말고 인정함으로써 나아오라는 분명한 사인이 되지않았을까.

그리고 바리새인들에게까지도 그런 메세지를 담아 말씀을 하셨던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들을 귀가 있는 자들에게만 들렸을 메세지겠지?

 

죄앞에서 누구보다 냉정하게 자신을 바라보고, 솔직해져야함을 잊지말자.

 

2.허물을 벗은 신앙 :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기운 새 것이 낡은 그것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되느니라

낡은 옷을 아무리 새로운 천으로 덧대도 그 낡은 것은 가려질뿐 없어지지 않는다.

아무리 겉으로 '척'을 해봐도 민낯을 드러나게 되면 그 낡은 모습들, 죄의 모습들이 다 드러날것이고,

그게 아니더라도 눈썰미 좋은사람들에게는 가리는 것 자체부터 의미없는 것이다. 

결국엔 허영심 가득한 허세, 속빈 강정일 뿐인 것이고, 아무리 감춰봐야 얼마 지나지않아 그 실체가 드러나게 될것이다.

 

또 새 것이 낡은 그것을 당기어 헤어짐이 더하게 된다는 것은 아무리 자신의 낡은 모습을 감춰 속인다 하더라도

그 속임으로 인해 또다른 낡음을 낳게 되는 말씀임을 깨닫게 하신다.

결국에 아무리 열심히 철저하게 '척'을 해봐야 결국에 실체는 드러나게 되어있고,

누군가가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결국에 그 '척'들로 인하여 민낯이 드러나게 되어있음을 뜻한다.

 

나에게, 주님에게 솔직해야함을 잊지 않아야할것이다.

'척'하지 않는 솔직한 신앙을 간직하자.

 

3.본질 바로잡기 :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시험을 칠때는 출제자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해야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매순간 시험의 연속이다.

우리는 모든 상황과 모든 말씀속에 숨어있는 주님의 의도를 파악해야한다.

하지만 우리는 매순간 잊게되고, 그로 인하여 자꾸만 본질(주님의 의도)를 놓치며 살게된다.

주님이 주시는 시험의 의도를 바로 알게 되는 순간 그 시험의 공략법을 파악하게 되고, 더욱 주님을 의지하고 믿게된다.

 

어려운 시험을 격는다고해서 주님을 원망하기보다 먼저 주님의 의중을 여쭙는 시간을 가져보도록 하자.

주님의 의중 속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과 성장을 발견 할 수 있을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찾게 된다면 우리는 더욱 강인해지고, 더욱 자유로워지고, 더욱 기뻐하는 삶을 살게 될것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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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앞에서 무엇을 감출수 있을까요

모든것을 다 아시고 모든것을 다 꿰뚫고 보시고 다 보고계시는 분인데 감추려는 것 자체가 부끄럽습니다.

하지만 저는 인간으로써 또 자꾸만 아담과 하와처럼 숨으려 하고, 감추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 모든 죄악을 드러내시는 주님

그 죄를 빛가운데로 드러내시고 죄를 태워 나를 다시금 주님앞으로 인도하셨습니다.

나의 수치와 부끄러움을 드러내시고, 태우시고 주님앞으로 다시 나아올수 있게 되었음에 감사드립니다.

 

저의 인간의 본성에 의하여 다시 '척'하지 않는 신앙이 될거라고는 확신치 않고 오히려 저 자신을 믿기가 힘듭니다.

하지만 주님을 의지함으로 이겨나갈 수 있는것을 체험할 수 있었고, 이것을 잊지 않고 끝까지 의지할 수 있도록 주님께서 도와주세요.

솔직하지 않고 자꾸만 숨으려는 나 자신을 주님앞에 무릎 꿇려놓고 회개합니다.

오직 빛이신 주님을 바라봅니다.

 

매순간 주님이 주시는 시험 속에 주님의 의중을 여쭙고 참된 본질을 찾으며 주님을 의지하는 그런 신앙이 되게하시고, 그로 인해서 자꾸만 죄성이 올라와 감추려는 저 자신을 깨우치심으로 다시금 죄악가운데로 가지 않도록 주님께서 인도하여주세요.

 

감사합니다 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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