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풀리지않던 의문이 있었다. 

이 글에서 다루고싶은 내용은 그 질문이 무엇인가가 중요한게 아니다.

"질문은 내게 있어서 어떤 의미를 가지느냐"다

질문은 나의 현재 상태를 점검하게 하며, 수준을 알게 해준다.

 

약...3달동안 내가 이런 의미를 과소평가하고 대수럽지않게 여겨서 읽지도, 쓰지도 않았다.

아니 오히려 기피했다. 

"나에게 그 뜻은 지금의 나 자신을 돌아보지 않겠다"라는 말과 다르지 않는다고 판단된다. 

글을 통해 나를 들여다보고, 대화할 수 있는 소통의 창구가 되어주는데

그 창구를 닫아버리는 것이었다. 

그러니 나자신과의 관계가 좋아질래야 좋아질수가 없게 되는것이다.

세상 어떤 관계든, 대화 없는 관계는 파국일 수 밖에.

 

나에대해서 깊이 아는것이 중요하다고 해놓고, 정작 나와의 대화를 단절하는 꼴이라니

이 무슨 모순적인 행동이란말인가.

무엇이 그토록 미웟을까.

무엇이 그렇게 못마땅했을까

못마땅한게 나자신이었을까 당신이었을까

아직 알지못한다. 하지만 더이상 이 질문은 중요한 질문이 아니다. 

그 대상이 누가 됐건, 이 슬럼프 기간동안 풀지못한 의문 때문에 생긴 미움은 해소가 되었으니까.

 

어찌 됐건간에 또다시 두달동안 닫아두었던 나의 마음을 다시 열게 해준 나의 신호탄을

오늘 이렇게 이곳에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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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를 기다리는 과정 속 이야기

 

김다영 초대전 2/2~2/28

@pur_pleely

 

시들지 않는 꽃집 알스트로담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이번 알스트로담의 네 번째 이야기는 작가가 아닌, 관객인 당신이 주인공인 전시입니다. 

우리는 흔히 '결과'를 목표로 살아갑니다. 무언가를 이루기 전의 시간은 애매하고, 불안하고, 때로는 의미 없게까지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물을 마시고, 햇빛을 쬐고, 비바람을 견디고, 잡초를 정리하는 시간이 쌓여야 비로소 가장 아름답게 꽃이 피어납니다. 

 

이번 전시는 "삶의 9할은 개화를 기다리는 과정"이라는 깨달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내부에서는 분명히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순간들.

비교와 조급함 속에서도 결국 나만의 속도로 흘러가던 시간들.

아직 결과는 없지만 분명히 의미 있었던 오늘들.

 

이곳에 놓인 작품들은 그 '과정의 단면'을 꽃의 형태로 담아낸 기록입니다.

아직 피지 않았다는 이유로 지금의 시간을 작게 보지 않기를 바랍니다.

 

알스트로담의 꽃들은 성취의 순간이 아니라, 당신이 지나온 그리고 여전히 지나가고 있는 시간에 대한 응원입니다.

시들지 않는 꽃집 알스트로담 ( Welcome To Alstrodam )

평생 시들지 않는 꽃집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네 번째 '개화를 기다리는 과정' 속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가장 예쁜 꽃을 피우는 방법 ( The way to bloom the most Beautiful flower )

내면에서 스스로를 축복할 때
비로소 가장 예쁘고
시들지 않는 꽃을 피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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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방문했던 유연작가님(당시 모호 작가)의 전시회에서 감상했던 작품이 기억나는 문구다. 

사람의 변화는 내면속에서 피어난다. 

외부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내면의 자신의 진정한 가치를 찾는 순간부터

변화가 시작된다는 인사이트를 주었던 작품.

 

더 이상 내가 아닌 것을 탐내지 않고,

더 더더욱 나 자신에 대해서 깊이 들여다볼 수 있게 해 주었던 작품.

난 이렇게도 아름답고 존귀한 존재인데 무엇을 더 탐내었을까.

자신의 진정한 가치는 자신 스스로를 축복할 때 가장 찬란하게 빛이 난다.

조급함 다루기 ( Learning to handle impatience )

 

마음이 초조해질 때 서로 다른 목적지를 향해 가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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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순간도 조급한 감정이 내 마음속에서 공존한다. 

현실의 압박감이 나의 숨통을 쉴 새 없이 조여 온다. 

내일은 어떻게 살까.. 어디로 취업해야 할까...

과연 이제 받아주는 곳이 있기는 할까

계속해서 이 불안한 마음이 나를 움츠려 들게 한다. 

 

이러한 모든 불안감이 조급함에서 비롯된 감정임을 안다. 

그래서 이 조급함을 한번 더 내려놓고자 오늘 이 전시회를 관람하러 왔다. 

나의 불안한 마음에 굳건히 맞서는 저항감이다. 

당장에 이 조급함을 달래기보다, 오늘의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것이

내게 더 유익하고 도움이 된다는 것을 너무 깊이 깨달았기 때문에

 

오늘 하루 살아내는 동안 불안할 수 있다. 하지만, 그대는 잘 이겨낼 것이다. 

그러니 오늘을 아름답게 살자.

당신은 지금 그 순간 아름답다. 그 자체만으로 그 상황을 이겨낼 만하다. 

그러니 우리 함께 아름답자.

고마움 ( Gratitude )

함께이기에 가능한 것,
용기를 낼 수 있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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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모든 관계를 끊어냈을 때 진짜 혼자인 줄 알았다. 

이 험난한 세상 속에 또다시 혼자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시금 손 내밀어주는 당신의 손이 거대한 옹벽 같던 거대한 에너지를 힘없이 무너지게 만들었다. 

모든 관계가 끊어진 줄 알았는데 당신이 지어주었던 그 이름만큼은 여전히 건재하더라.

잠깐동안 그 이름으로 살아보았다. 

그 이름이 나를 2년 동안 살게 해 주었다. 

 

놀랍게도 그렇게 비워진 나의 관계망이

비워진 이후부터 새로운 사람들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더 성숙하고, 멋있는 사람들이 나를 찾아와 주었다. 

이 경험은... 그 어떤 표현으로도 형용할 수 없는 경이로운 감정이다. 그저 감사할 따름

나를 그 고립된 시간 동안 버티게 해 주었던 사람에게, 그리고 그 사람들에게

함께 해 주어 고맙다고, 나 다시 일어날 수 있게 해주어 고맙다고

내가 버틸 수 있는 버팀목이 되어주어서 고맙다고

 

나의 이름을 죽였던 사람들을 향한 감정들은 여전히 살아있다.

하지만 그 감정들의 크기는 작아진 것을 느낀다.

이 감정이 작아질 수 있었던 것은,

그 시간만큼 나의 곁을 지켜주었던 사람들, 

그리고 나와 새롭게 연결되어 주었던 사람들이 있어서 내가 비로소 희망을 느끼고 살아갈 힘을 얻을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오늘만 존재할 뿐 ( Today in all there is )

 

과거는 힘이 없다.
지금부터 내리는 각각의 결정과
떠올리는 모든 생각이
오늘을 만들어간다.
그렇게 쌓인 오늘이 나를 다시 만든다.

잘못든 길 (Down the wrong path)

 

길을 잘못 들 수도 있다.
그 길만이 정답이라고 누가 정해뒀던가?
최적의 경로는 아닐지라도 도착만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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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많은 실패의 과정들이 나의 아픈 잔상이 되어 나의 오늘을 더럽히곤 한다.

생각보다 그 잔상들이 너무 짙다. 

나와 맞지 않았던 선택들로 인하여 

 

나를 찍어 누르는 수많은 감정들이 나의 궁창을 더럽힌다. 

하지만 난 그 궁창을 나의 아름다움으로 다시 정화하고, 새로운 하늘을 그려낸다. 

 

궁창에서 떠돌며 나를 어지럽히기만 하는 게 고작인 과거의 기억들은 그저 꿈일 뿐이다. 

나에게 아무것도 하지 못함을 나는 안다. 

그 기억들에게 주저하여 가끔 넘어지곤 한다. 

넘어지더라도 다시 딛고 일어선다. 이겨낸다.

내 마음이 잠깐 주저할 뿐이지 나에게 피해를 입히지 못한다.

 

그렇게 다시 일어나 새로운 내 하늘을 만들어낸다. 

 

 

 

 

은호의 꿈은 '작품'이었다. 

세상에 당당히 내세울 수 있는 자신의 '작품'

그 작품으로 자신의 독창적인 세계관을 세상에 선보이고 증명해내고 싶었다.

그렇게 각자의 꿈을 품고 살아가다가 

 

정원의 꿈은 '안식처'였다. 

보육원에서 자라나 단 한 번도 누려볼 수 없었던 안식처.

그저 자신의 일상을, 꿈을, 그 길을 응원해 줄 곁을 내어주고 함께 있을 수 있는

그런 믿을만한 안식처를 원했다.

로맨스 영화를 볼 때마다 답답했다.
꼭 헤어지고 나서야 정신을 차리는 멍청이들 같아서.
내가 그 멍청이였다.

 

그렇게 평생 서로의 꿈을 반드시 이루리라 다짐했다.

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더라. 

학교 울타리 밖 사회로 나온 그들은

어느새 시간과 현실에 쫓기다 거듭된 실패에 지쳐만가고

은호 자신의 상황때문에 함께 꿈을 포기하고 있는 이 현실이 너무 비참하게 느껴진다.

그 미안한 마음을 애써 외면하고 어떻게든 그 상황을 이겨내보려 노력한다.

둘 사이의 다정함은 사라진지 오래다.

솔직한 감정을 외면하면 자연스레 나오게되는 모습이다.

 

각박한 사회 생활 속에서 쌓인 스트레스를 해소하지 못한 채

소중한 사람을 향해 자신도 모르게 쌓인 감정들이 터져나온다.

정원 또한 은호의 태도에 참고 있던 감정을 터트리게 된다.

 

언제나 그렇듯.... 사람은 환경이 바뀌면 사람의 태도도 바뀌는 안타까운 현실을 마주하게 되는 듯하다.

그렇게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잃고 나서야 한 가지 깨달음을 얻는다.

우리는 태풍이 지나가 고나서야 그 소중함을 깨닫는 어리석은 인간이니까...

우리 모두 그런 아픔을 품고 살아간다. 

 

정원은 빛바랜 관계를 어떻게든 살려보고자 계속해서 비언어적으로 표현한다.

"당신이 내게 안식처예요. 다시 빛을 찾아 우리 함께 웃고 싶어요.

많은 거 거창한 거 바라지 않아요. 그냥 예전처럼 나의 편안한 안식처, 그거 하나면 족해요.

우리 처음 만났을 때처럼 꿈을 좇으며 살아요."

 

누군들 그렇게 살고 싶지 않을까...

현실은 그들을 그렇게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는다.

계속 그들을 쥐고 흔든다. 방해한다.

이 현실에서 은호는 정원의 비언어적인 표현을 알아듣지 못한다.

이런 솔직한 정서적 소통의 부재한 채 서로를 향한 부재가 결국 서로의 부채감으로 되돌아간다. 

이와중에 현실은 그 둘사이를 어떻게든 갈라놓으려고 한다.

정원은 팔이 찢어지더라도 끝까지 부여잡으려고 한다.

정원의 입장에선 은호가 자신의 거듭된 실패에 무기력해져 자신은 안중에 없다는 것으로 느꼈을것 같다.

그시점의 관계를 이어나가고 있는것이 혼자만의 노력이라는것을 깨닫고 결국 놓아주기로 한다. 

 

먼 훗날 우연히 다시만났을 때 은호가 정원에게 묻는다. 

은호: 그때 내가 지하철을 탔다면.. 우리는 안 헤어졌을까?
정원: 그랬으면, 너랑 함께 했을거야 영원히 

이 말은...정말 자신을 원망스럽게 하는 대사다.

그때 조금이라도 더 빨리 정신을 차렸더라면...

그때 조금이라도 덜 어리석었더라면...

조금이라도 더 성숙했더라면...

 

너무나 아픈 현실은 

인간은 소중함을 잃어야 비로소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고 성장하는 한계를 가진 존재라는 점이다.

물론 개인차야 있겠지만, 누구나 이런 교훈있는 경험은 한번쯤은 다 있을것이다.

은호: 내가 널 놓쳤어
정원: 내가 너를 놓았어

 

너희 둘이 헤어졌지만
매년 이맘때면 정원이가 생각나고
이번에도 네가 좋아하는 반찬을 잔뜩 해버렸다.
인연이란 게 마지막까지 잘 되면 좋겠지만,
서로 실망시키지 않는게 쉽지는 않다.
사람의 삶도, 마음도 변할 수 밖에 없는 거니까
그래도 괜찮단다.
나한테도 은호한테도 너는 참 귀한 사람이었어.
어떤 선택을 하든, 어떤 삶을 살든,
정원이는 잘 해낼 거야.
항상 밥은 꼭 잘 챙겨먹고,
아저씨 반찬 먹고 싶으면 언제든지 와.
늘 건강하고, 행복하렴

 

상황에 의해 변해버린 관계에 상처입고 이별을 선택하게 된 모든 사람들에게 건네는 위로같았다.
비슷한 상황을 겪은 사람이라면 이 편지에 위로를 느끼지 않을 수 없을것이다.

아니 이 편지뿐만이 아니라 이 내용 전체가 공감이 될 수 밖에 없을것이다.
디테일한 상황을 그려내고 있지만 그 디테일함 속에 각자만의 사연을 다 담고있었으니까.
사람들마다 각자 다른 사연으로 이별을 선택했지만
결국 이 영화의 스토리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 모두가 각자의 작품을 꿈꾸고, 각자의 안식처를 꿈꾼다.
그 꿈을 이루어 내보고자 아둥바둥 살아내지만,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고 계속해서 방해를 한다. 저항을 한다.
그 저항에 맞서서 살아내다가 결국 삐끗해서 소중함을 놓치게 된다.

그리고 그 경험을 통해 얻어낸 한가지 확실한 교훈은
익숙함에 속아 소중함을 잊은것이 아니라
세상에 치여 살아내다 소중함을 잊은 것이다.
그러니 세상에 치여 살다가도 결국에 내가 안식할 곳은 나의 소중한 사람들임을 기억하자...
다시금 그 소중함을 잃고 싶지 않으니까.

 

(부제 : 이 사랑 통역 되나요? 차무희 캐릭터 분석)

많은 이유들이야 있겠지만,

당장에 생각나는 이유 하나는 당장에 그 일을 직면할 힘이 없어서이기 때문이다.

이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 작품에서 여주인공 차무희의 애착유형이 지독한 불안- 회피형으로 등장한다.

그 모습 때문에 우여곡절이 길어지게 되고, 질질 끄는 모습 때문에

관찰자 입장에선 답답한 감정을 느끼곤 하는데

이 캐릭터에 대한 성장환경을 들여다보면 충분히 납득되는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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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적 차무희는 엄마의 사이코패스 기질에 공포에 눌려 도망을 친다.

당시 그 연약한 꼬마는 엄마의 그 폭력적인 행태에 대해서

맞설 힘도, 용기도 있을 턱이 없었다.

그러니 그 환경에서 도망치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었을 것이다.

 

어린아이 입장에서는 가족과의 자신을 자아 정체성의 완전한 독립을 이루지 못했다.

무의식적인 생각 때문에 엄마를 향한 타인들의 시선이 자신에게도 향할 것을 짐작하고

최선을 다해서 그 모든 기억들을 외면하고 도망쳐온 것이었다.


그 회피의 선택을 통해서 자신의 자아가 붕괴가 될 것을 보호했다.

최선을 다해서 성인이 될 때까지

지속적으로 공격해 오는 기억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보호해 온 것이다.

그러다 보니 서커스 공연단의 코끼리처럼

그 회피해 왔던 습관들이 삶 속 깊숙이 스며들어

자신도 모르게 같은 방식으로 자신의 현실을 회피해 온 것이다.

그래서 눈앞에 있는 행복을 두고도

계속해서 간만보고 지속적으로 도망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사람은 회피를 통해서 무엇을 얻을까?

“시간”이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당장에 감당할 힘이 없어서, 용기가 없어서 맞설 수 있는 에너지가 생길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다.

연약한 것이 아니다.

 

관찰자 입장에서는 답답함은 당연하다.

”충분히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왜 저기서 자꾸 물러나는 거지?”,

”이제 이겨낼 힘이 있잖아!! 근데 왜 자꾸 겁먹는 거야!?”

하지만 당사자 입장에서는 몇 가지 에러사항이 있다.

가장 큰 문제는 자신이 과거의 기억에 눌려있다는 것을 스스로 인지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이다.

 

그리고 인지한다 하더라도 전문가의 도움이 없이는

스스로 그 기억으로부터 건강하게 극복하기란 매우 어렵고,

스스로 극복한 사례도 드물다.

 

그러니 지금 당장의 단편적인 모습만 보고

그 사람의 행동 양산을 평가해 버리고

판단해 버릴 수 없다는 근거

여기서 발생한다.

 

물론 문제를 방치하면 통제하기 힘들 정도로 커져버리고,

수습하기가 어려워질 때가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빨리 그 일을 해결하라고 재촉하는 일은

그 사람을 더욱 도망갈 동기를 제공해 주는 “폭력”일 수밖에 없다.


물론 이 회피의 동기가 힘이 부족해서라는 이유를 일반화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근데 많은 사례들의 이유가 될 것이고
이 글이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를 이해하고 납득되어
받아들여줬으면 하는 마음이 생겼어요.

무엇보다 이것만큼은 확신합니다.


단언컨대 결단코 잘못된 감정은 없어요.
일반적으로 부정적인 감정의 동기는
그 상황과 환경, 그리고 자신의 컨디션에 따라서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반사적인 감정인 것이죠.

 

나는, 혹은 사람들은 자신의 세계관(생각과 철학, 가치관, 신념 등)을 어디서 보고, 배워서 살아가고 있을까?

내가 배운 곳은 성경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한 번 더 곱씹어 생각해 보면 진짜 그렇지만도 않았다.

일부는 '성경을 통해' 스스로 배운 것이라기보다, 누군가의 입과 글을 통해 학습된 해석 또한 섞여있었으니까.

이 또한, 내 주관이 아닌 그 누군가의 주관인 것이다.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세계관에 종속 된 인간이기 때문에.

이러한 한계성 때문에 자꾸만 책을 읽고 경험을 쌓고 토론을 즐기는 과정으로 세계관을 허물며 계속해서 넓혀가야한다.

네, 질문을 사는 겁니다.
오랜 기간 마음 한구석에 질문을 품는 거예요.
질문을 살아내는 거죠.
단순히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너무 자주 해결책을 찾아버려요.

 

질문의 목적은 해답을 얻는 것에 몰두하기보다,

시야를 넓히는 것과, 진짜 스스로의 옳은 정답을 찾아내려 노력하는 과정 또한

질문의 목적과 과정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과정과 시간 또한 내 자산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사회의 기준(혹은 자신의 세계관)으로 그럴듯한 정답을 내놓기 위해서

사회의 기준의 "정답"을 너무 몰두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스스로의 마음이 움직여지지 않은 답은 적어도 스스로에게만큼은 오답이다. 

마음이 동하는 스스로의 정답을 찾게 되는 여정을 통해 마침내 도착한 답이라면,

그 정답은 그 무엇보다 소중한 보물이 될 것이다.


혹여 엉뚱한 답을 할까 우려된다면 그 마음을 조금 더 들여다봤으면 한다.

그 마음은 상대의 하나님을 존중하지 않는 것이고, 상대를 사랑의 대상보다 교육의 대상으로만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스승과 제자가 아닌 상호 동등한 입장에서 교육의 대상이라고 느끼는 시선은 매우 불쾌할 수 밖에 없다.

(설령 스승과 제자의 입장이 맞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정답만이 진리라고 이야기하는 방식은 조심스럽다. 

바운더리를 정해놓고 거기에서 자유로운 과정을 통해 스스로 찾아낼 수 있는 "과정"을 제공해주어야겠지.

결국 이 환경과 과정이 "질문"이 되는 것이다.)

 

그 스스로의 정답을 찾아가고 있는 대상에게 다른 누군가가 자신의 정답을 알려주는 것은 때론 폭력이 될 수 있다. 

적어도 준비되지 않은 자에게는 명백한 폭력이다.

상대의 내면이 아직 그 답을 감당할 준비가 없으면, 답은 선물이 아니라 공격이 된다.

 

자신의 정답을 알려주기 전에 몇 가지 점검을 하자.
1. 상대가 준비가 되어있나?
2. 나와의 관계가 준비가 되어있나?
3. 이 정답이 저 사람에게도 유익할까? 

 

이 조건이 충족한다고 해도

"이건 내 정답이고, 이런 예시를 알려줬으니 넌 너의 마음이 동하는 정답을 한번 찾아봐"라고 자유의지 선택을 쥐어준다면 된다. 

 

반대로 하나라도 충족되지 않는다면 스스로의 정답으로만 가지고 가자.

아무리 그 정답이 옳다고 하더라도, 상대방의 정답으로 적용하려는 순간 그 관계는 금이 가기 시작한다.

이것이 진정한 성경에서 기록된 "사랑과 존중"이라고 생각을 한다.

 

물론 나도 잘 안돼서 다시 한번 이 사랑과 존중을 실천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기록하는 글이다.

 

성공은 어떤 모습이야?

정말 심플한 짧은 질문 하나가 내 온 내면세계를 휘젓고 다닌다. 

어떤 모습이냐고? 이 모습을 상상하려면 기준점부터 세워야 하나? 아니면 방향? 

어떤 모습이 성공인거지? 난 누굴 보고 성공했다고 느끼나?

 

좋은 질문의 효과

1. 끈기가 있다. 마음을 단단히 붙잡고 절대 놓아주지 않는다.

2. 문제의 프레임을 다시 짜서 완전히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게 한다. 

3. 문제의 해답을 찾게 할 뿐 아니라, 해답을 찾는 행위 그 자체를 재평가하게 만든다.

4. 똑똑한 대답을 끌어내기도 하지만 침묵을 끌어내기도 한다. 

5. 더 좋은 질문을 불러일으킨다.

 

좋은 질문은 관점의 근본적 변화가 나타나리라는 희망에서,

내가 아는 것뿐만 아니라 내가 어떤 사람인 지를 묻는 인정사정없는 자기 심문을 거친다.

 

글쎄... 내가 생각하는 성공...? 그냥 성공은 모르겠고 행복하고 싶다.

돈도 욕심없고.... 그냥 하고싶은거 하고, 재밋는거 하면서 웃으면서 살고싶다. 재미있게 살고싶다.

아무런 방해가 없을 수 없겠지만, 그냥 이렇게 웃으면서 재미있게, 좋은사람들과 더불어 사는것말곤 생각나지 않는다.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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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관은 어디서 만들어지나

  • 사람은 성경·책·경험·타인의 말/글을 통해 세계관을 형성한다.
  • 그 안엔 ‘내가 배운 것’뿐 아니라 누군가의 해석(주관)도 섞여 있다.
  • 그 해석을 옳다고 느끼고, 받아들이는 것 또한 내 주관적 수용이다.

세계관의 한계와 확장

  • 인간은 자기 세계관에 종속적인 존재다.
  • 그래서 독서·경험·토론으로 세계관을 허물고 넓히는 과정이 필요하다.

질문을 산다는 것

  • 질문은 해결책을 빨리 찾는 행위가 아니라, 오래 품고 살아내며 시야를 넓히는 여정이다.
  • 목표는 “사회의 정답”이 아니라 스스로 납득하는 정답에 가까워지는 것.

정답 강요의 위험

  • 사회의 정답에 몰두한 답은, 내 마음을 못 움직이면 오답일 수 있다.
  • 준비되지 않은 사람에게 답을 주는 건 폭력이 될 수 있다.

답을 말하는 방식의 윤리

  • 설령 스승-제자 관계라도, 내 정답만이 진리라고 말하는 방식은 조심해야 한다.
  • 필요한 건 정답 주입이 아니라, 바운더리(안전한 틀)를 세우고 그 안에서 스스로 찾게 돕는 자유로운 과정을 제공하는 것.
  • 결국 환경과 과정 자체가 질문이 된다.

답을 주기 전 점검

    1. 상대가 준비됐나?
    2. 우리 관계가 준비됐나?
    3. 그 답이 상대에게 유익한가?
  • 주더라도 “이건 내 정답”이라 말하고, 상대가 자기 답을 찾을 자유를 남긴다.

좋은 질문의 효과

  • 끈질기게 붙잡는다(쉽게 놓아주지 않음).
  • 프레임을 재구성해 새로운 시각을 연다.
  • 답뿐 아니라 답을 찾는 행위 자체를 재평가하게 한다.
  • 대답과 침묵을 모두 끌어내고, 더 좋은 질문을 낳는다.

내가 지금 붙든 결론

  • 다만 분명한 건 행복: 돈보다 재미, 하고 싶은 일, 좋은 사람들과 웃으며 사는 삶.

세상을 경계해야하는 대상이라고만 배웠다.

세상을 가까이하지말라고.. 친해지지말라고

근데 세상을 경계하다보니 어느새 내 삶이 지옥이 되어있었다.

알고보니 내가 보는 세상은 내 세상이었던것이다.

내 세상을 사랑해보기 시작했다.

내 시야에 담기는 모든것들이 바뀌기 시작했다.

먼저 좌우명도 생겼다..

세상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다보니

나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세상과 나의 아름다움을 통해 설계자의 영광을 발견한다.

 

세상 속에 숨겨두신 아름다운 것들을 발견하는 재미를 통해

이 모든 아름다움을 창조하신 조물주의 영광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서 질문이 하나 생겼다.

크리스천은 세상과 척을 지고 살아가야하는것이 성경적인 말씀이라면

왜 우리를 세상에 보내셨을까?

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는 지상명령을 하셨을까?

그 모든 민족이 곧 세상일텐데…

이러한 질문을 통해 새로운 시선으로 세상을 보기 시작하니 또 새롭게 해석되는 말씀 구절이 발견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3장 16절

 

하나님이 그 세상을 사랑하신다고 한다.

너무 사랑해서 자신의 독생자를 보내셨다고 한다.

아니 정확히 자신이 직접 죽으러 이 땅에 오셨다고 한다.

 

세상 또한 주님이 창조하신 예술작품인데 왜 경계해야할까?

그냥 경계해야할 한정된 부분이 있을 뿐인데

그 부분을 “세상”이라는 단어로 통칭해버리니

오해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 말을 했던 사람이 의도가 있었건, 없었건.

 

어쨌든 세상을 사랑하자.

사랑하고 품자.

포교하려고하지말고,

선교를 하려고 하지말고,

전도를 하려고하지말고,

사랑하자.

 

전도하지 않습니다.

복음 전파에 의미를 두지않겠습니다.

그냥 사랑하겠습니다.

그냥 사랑에 실천하겠습니다.

 

감사일기

  1. 1월 잘 버텨낼 수 있게 해주심에 감사합니다.
  2. 2월 좋은 사람들과 시작할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3. 아침부터 재미있는 일들로 시작할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4. 지금도 계속해서 좋은 사람들을 다시 알게되고, 연결 시켜주심에 감사합니다.
  5. 드디어 눈물 터트리게 해주심에 감사합니다.
  6. 세상을 사랑하라는 메시지를 다시 상기시켜주심에 감사합니다.
  7. 나의 부족함을 인지시켜주시고 나아갈 방향을 일깨워주심에 감사합니다.
  8. 일상을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사람들을 연결시켜주심에 감사합니다.
  9. 수련회 안가려고했는데 갈 수 있게 됨에 감사(?)합니다.
  10. 2월 새로운 예창패 준비 할 수 있게 서비스 설계 완료하게 해주심에 감사합니다.
  11. 새로운 동역자를 만나게 해주심에 감사합니다.
  12. 취업이 잘 안되더라도 다시 힘을 내 새로운 곳 도전할 수 있는 마음을 허락해주셔서 감사합니다.
  13. 남들은 잘 느끼기 힘들어하는 섬세한 심미안을 통해 세상의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게 해주심에 감사합니다.
나의 아이야.

너는 참 소중한 아이란다.

내 손으로너의 손과 발, 입과 얼굴을
하나하나 빚어 창조하였고,

내게 너무 소중한 보물들을
너의 내면 깊은 곳에 담아주었단다.

내 소중한 것들을
너에게 기꺼이 줄 만큼
너는 아주
소중하고 존귀한 나의 자녀란다.

그런데 아이야,
어느 순간부터
너는 이 사랑의 언어를
다시 ‘텍스트’로만 읽고
받아들이고 있구나.

아이야,
내가 너를 불렀고,
네가 그 부름에 응답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이 있단다.

그건 바로너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란다.

다른 사람의 사랑 말고,
내가 너에게 부어주는 사랑으로
먼저 충만함을 누리렴.

그 사랑을
머리로만 해석하지 말고,
잠시 눈을 감고,가슴이 따뜻해지는 곳에조용히 머물러 보렴.

그 마음이 기틀이 되어야
네가 품은 빛이 힘을 얻고,
더 찬란하고 아름답게 발할 것이란다.

나의 소중한 아이야,
내가 너를 아끼는 것을 네가 충분히 느꼈으면 한단다.

나의 사랑을,나의 마음을온 마음으로 누렸으면 해.

그저 글로만 여기는 것이 아니라,
너를 안아주는 목소리로,너를 살리는 사랑의 언어로
읽어주었으면 한단다.

 

오늘 돌아온 탕자 돌아온 이후의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이 탕자가 돌아와서 아버지에게 입었던 은혜에 감격하고 보답하고자 다시 무일푼으로 출가하여

정말 열심히 성실히 일하고 몇년 후 성공한 후에 아버지께 드릴 선물을 사들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돌아온 집에는 아버지 대신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버지의 유품과 유언장이었다.

 

"사랑한다 아들아,

내겐 다 필요 없고 너 하나만 있으면 된단다.

보고싶구나..."

 

다 아는 이야기다. 

하지만 몰랐던 이야기다.

머리로는 아는 이야기였으나, 마음으로는 몰랐다.

 

이 이야기를 통해서 비춰지는 나의 마음은

어렸을 때부터 사랑받지 못했던 마음이

자꾸만 다른사람들에게 사랑을 요구하는 마음이 비춰졌다.

사랑을 달라고, 나 외롭다고...

 

이젠 충만하다.

더 원하지 않기로했다.

나 하나로 족하다.

그래, 난 아름다운 존재고, 주님의 소중한 걸작품이다.

나의 이름대로 나의 기도가 빛을 발할것이고, 

그 빛이 주변을 따스하게 만들어줄 사랑으로 채워질것이다.

 

나, 주님의 사랑 하나로 족하다.

주님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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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심이 깊다는 말을 종종 듣는다.

그런데 난 그 말에 선뜻 고개가 끄덕여지지 않는다.

 

내가 깊은 건 신앙심이라기보다 생각이다.

그저 내가 무너지지 않을 만큼, 건강할 만큼 나를 돌보고 싶어서다.

 

나에게 신앙은..아니 예수님은 종교가 아니다. 그냥 관계일 뿐.

나와 세상을 잇고, 나와 나 자신을 이어주는 매개체, 

내가 나를 품을 수 있게, 세상을 조금이라도 더 건강하게 살아가게 하는 힘

결국 내 정신을 더 이롭게 만드는 중심 관계다.

 

사람들은 좋은 관계를 판단할 때 이런 질문을 자주한다.

"그 관계가 나를 더 건강하게 만들어주었나?"

예수님은 내게 그 질문에 가장 분명하게 '그렇다'라고 답하게 하는 관계였을 뿐이다.

그래서 '신앙심'이라는 말로 내 상태를 정리하는 데에는 동의하기가 어렵다.

애초에 내게 예수님이 종교가 아닌 관계가 되어버린 이상

신앙심이라는 개념 자체가 내 안에 존재할 수 없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세계관 정리

그 예수님이라는 존재가 어떠한 논리로 나를 더 건강한 존재로 이끌어왔는지에 대한 논리를 정리해 본다.

 

전지전능하고 실수가 없는 완전한 존재인 존재가 있다고 가정하자.

그 존재는 실수를 하지 않고 세상을 완벽하게 설계했으나, 그 설계자의 위치를 탐내던 존재에 의해서 결함이 생겨버렸고

그분은 그 결함마저도 실수 없이 다시 보완하려고 아주 완벽한 설계를 세우셨다는 가정을 추가한다.


여기에서 혹자는 반박할것이다. " '완벽함'에 어떻게 '결함'이 생길가능성 조차 생긴다는거 자체가 말이 안되지않느냐? "

틀린말은 아니다. 그렇게 생각 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말하고 싶은 이 "완벽함"은 인격들의 관계 질서다.

그 인격들의 관계 질서에서 자유 의지를 배제해버린다면 그것은 완벽함의 기준에서 벗어나게 되는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그 세상에는 인간들의 자유의지와 욕심, 욕망, 건강하지 못한 상태들로 인해서 악행을 저지르게 되고

그게 서서히 안 좋은 영향으로까지 미치게 되었다.

 

만약에 이런 세상이 있다고 가정을 하게 된다면, 타인의 욕심이 나의 불행으로 온다고 하더라도,

이 세상이 아무리 타락하고 피폐해진다고 하더라도 과연 그 신을 탓할 수 있게 될까
그냥 이 세상이 병들어가는 모습은 그저 인간의 탓으로 머물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전지전능한 조물주의 존재는 그 인간의 자유 선택을 존중함과 동시에

그 자유 의지를 강제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계획 안에서 회복의 방향으로 엮어, 세상이라는 그릇의 결함을 수리하려 애쓸 것이다.

 

이것이 그분이 세상을 창조하고 운용하고 사랑하는 방식인 것이다.

자신의 손으로 모든 것을 창조하셨으니,

그 모든 것 중 하나도 자신의 손으로 해하고 싶지 않은 것이고

그 모든 것 중 하나라도 자신의 의지로 피조물의 자유 의지를 존중하지 않는 역사를 쓰고 싶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면서도 자연스럽게 자신의 계획을 그려나가고 계시는 것이겠지.

나는 그냥 그렇게 해석하기로 했다.

 

이렇게 해석하는 것이 내가 살아갈 세상을 사랑하는 방식인 것이다.

내가 살아갈 이 세상을 사랑하지 않으면 이 세상을 어찌 살수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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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에서 느낀 감정, 

혹자는 위로, 혹자는 따스함, 아픔, 작품활동의 공감, 색감..

서로 다른 세계관을 공유하다보니 내가 느낄 수 없었던 인사이트를 함께 공유하고 느껴보는것이 매우 새롭고 감사한일이었다.

 

아무래도 혼자 작품 세계관을 느끼기에는 매우 한계가 있다.

인문학적인 해석은 남다를지 모르겠으나 미술적인 해석은 매우 한계가 있음을 번번히 느끼니까.

 

서로 다른 세계관, 프레임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이 그 프레임을 함께 연결하고 나누고 공유하면서

조금씩 더 넓어진느 프레임을 느끼고 있노라면 "이것이 성장이고 깨달음이구나." 함을 깨닫는다. 

 

더 많은 세계관을 들여다보고, 공유하고, 성장하길원한다. 

또 더 많은 분들이 함께 해주었으면 좋겠다. 더할나위없이 감사할듯하다. 그냥 함께 해주시는 그 자체만으로. 

 

부족하더라도 따라와주었던 많은 참여자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이 글을 통해서 올리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우울증을 극복하고 나서부터 내 마음에서 가장 큰 변화로 느껴지는 것이 있다.

매일 아침 저주 하던 저 하늘이 이뻐보이기 시작했다. 

 

지나고 나서야 깨달은 것이지만 그 저주하는 마음은 곧 나를 향하게 되는 마음이었다.

나의 세상을 욕하는 것이 나를 미워하게 되는 마음으로 이어지더라. 

내가 살아가는 세상을 사랑하게 되니 비로소 나를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그전까지 내가 살아갈 세상을 왜 미워했는지 곰곰이 생각해 봤다. 

정말 심연 깊숙히 들여다보고 톺아보고 나서야 깨닫게 되었다. 

 

나는 깊은 사람이고, 내면 깊숙히 들여다보고 관찰하면서 연구하고

그렇게 얻어낸 지혜로 세상을 따뜻하게 밝혀주고자 하는 꿈이 있다. 

하지만 지금껏 살아왔던 나의 세상은 그러한 마음들을 자꾸만 억누르는 상황들로 만들어져 왔다. 

 

학교폭력과 가정폭력들 뿐만이 아니라

공인이 아닌데도 모두가 나를 주시하고있는 듯한 상황까지...

나의 숨통을 조여오는 요소들이 셀 수 없이 많았으니까.

지금 생각해보면 그 숨 막히는 상황들을 어떻게 다 견뎌왔나 싶다.

 

아직도 주변 시선들로부터 자유롭지 못한다. 

눈치가 없으나 살아남기위해, 세상 속에 섞여 있기 위해서 눈치를 보는 것이 생존 습관이 되어왔고, 방어기제가 되었다.

 

가족이 나를 이해해주지 못함에 너무 미웠으나

혈연으로 함께 살아가야하는 공동체이므로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학교가 나를 괴롭히는것에 동급생들이 너무 미웠으나

어쨌든 함께할 수밖에 없는 학급생으로서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감당하기 벅찬 요구를 하는 교인들이 너무 미웠으나

아버지가 시무하시는 교회의 교인으로서 사랑할 수 밖에 없었다. 

 

세상이 나를 이해해주지 못함에 세상이 너무 미웠으나...

내가 살아가고자 하는 세상이므로 그 세상을 너무 사랑했던 것이다. 

 

이 사랑할 수 밖에 없게 되는 이 사랑이 나의 숨통을 조여왔다.

안타깝게도 자꾸만 사랑할 수 없는 상황에서 사랑을 강요하는 상황들이 

내가 살아갈 세상을 미워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나를 괴롭히던 동급생들과 나의 세상을 분리한다.

가족과 나의 세상을 분리하고,

교회와 나의 세상을 분리한다.

타인의 세상과 나의 세상을 분리하기로 했다. 

그래 나는 나의 세상을 살아간다. 

내가 살아갈 세상을 사랑하자. 사랑하자. 

내가 살아갈 세상이라는 방에 재미있는 것들로 가득 채우자.

게임기도, 보드게임도, 컴퓨터도, 영화관도, 복싱장도, 자전거도, 예술 작품들도, 책들도...

이 모든 재미있는것들로 내 세상을 아름답게 꾸미자. 

다른 사람의 세상이 아니라 내 세상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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