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가 멀다하고 반찬투정이 일상이었다.

엄마에게 반찬이 이게 뭐냐고

왜 고기반찬은 없냐고

나는 토끼가 아닌데 엄마는 맨날 풀만 먹인다고

그렇다고 해서 엄마는 나에게 고기반찬을 내줄 순 없었을 것이다.

누구보다 내가 건강했으면 하는 마음에서

그걸 알면서도 마지막까지도 투정부렸다.

"제발 고기반찬도 같이 해주면안돼?"

 

그렇게 독립을 결심했다.

독립하고나면 매일의 양식은 내가 고를 수 있고, 매일 고기반찬을 먹을 수 있으니까.

처음엔 누군가의 빈자리가, 더이상 보이지 않는 간섭이, 그 자유로움이 마냥 행복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평생을 혼자서 행복하게 살 수 있을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다가 혼자 있는 시간에 주변이 고요해져 생각에 잠길때면

누군가의 빈자리가 허전해보이고, 보이지 않던 노동이 미안해졌다.

그렇게도 밉던 풀떼기 반찬들이 그리워졌다.

우리를 키워낸 눈물이, 조금이라도 더 해주려는 땀방울이, 잘못했을 땐 건네준 위로가,

사고쳤을 땐 모든 일을 제쳐두고 달려와 나를 걱정하던 그 모습이...

 

대부분의 깨달음은 늦게 찾아오고 그 깨달음과 함께 후회도 같이 밀려온다.

이 늦은 후회를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분은 나를 아무말없이 꼬옥... 껴안아주셨다.

그리고 한참후에 한마디 꺼내셨다.

"고생많았다...기다리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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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같이 사랑을 부어주시는 주님

그리고 저는 그 사랑을 매일같이 투정부렸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랑이 아니라고...

"주님 이거말고 저거라고 몇번을 말해요"

하지만 주님은 그당시 그것이 제게 독이될것을 알고계셨습니다.

"아가야 모든것은 때가 있는 것이란다. 조금만 참고 기다려주겠니?"

"아 몰라요 안먹을래요"

이런 싸가지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여전히 나에게 사랑을 부어주십니다.

내가 보이던, 보이지않던.... 그 모든 사랑이 은혜입니다.

그리고 지금 그것을 새삼 깨닫습니다.

 

주님의 그 은혜를... 그 사랑을 산소와 같이 생각하는것이 아니라

그 산소마저도 사랑으로 여기는 시선을 꾸준하게 유지하고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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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일에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시다(마 12:9-14; 눅 6:6-11)
1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쪽 손 마른 사람이 거기 있는지라
2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주시하고 있거늘
3 예수께서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한 가운데에 일어서라 하시고
4 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그들이 잠잠하거늘
5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탄식하사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 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
6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니라

많은 무리가 나아오다
7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바다로 물러가시니 갈릴리에서 큰 무리가 따르며
8 유대와 예루살렘과 이두매와 요단 강 건너편과 또 두로와 시돈 근처에서 많은 무리가 그가 하신 큰 일을 듣고 나아오는지라
9 예수께서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작은 배를 대기하도록 제자들에게 명하셨으니
10 이는 많은 사람을 고치셨으므로 병으로 고생하는 자들이 예수를 만지고자 하여 몰려왔음이더라
11 더러운 귀신들도 어느 때든지 예수를 보면 그 앞에 엎드려 부르짖어 이르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하니
12 예수께서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고 많이 경고하시니라

열두 제자를 세우시다(마 10:1-4; 눅 6:12-16)
13 또 산에 오르사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14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15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러라
16 이 열둘을 세우셨으니 시몬에게는 베드로란 이름을 더하셨고
17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이니 이 둘에게는 보아너게 곧 우레의 아들이란 이름을 더하셨으며
18 안드레와 빌립과 바돌로매와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및 다대오와 1)가나나인 시몬이며
19 가룟 유다니 이는 예수를 판 자더라

1.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이 사건은 이전 큐티의 본문 마가복음 12장 1-8절의 내용(안식일에 밀 이삭을 자르다)과 매칭이 된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이삭을 자르는 모습을 바리새인들이 보고는 예수님에게 시비를 걸었던 그 사건.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지적을 듣고도 여전히 정신을 못 차려 또다시 안식일에 사람을 치유하는 일 가지고 시비를 걸고 있는 것이다.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 하셨던 것의 주님의 정확한 의미를 분별하고, 그 의도에 맞게 순종해야 할진대
바리새인들은 그것을 자신들 나름의 논리를 적용하고, 그것에 따르지 않으면 시비 트는 것이다.
무엇을 위한 안식일인지 자신들의 권력을 위하여 자신들의 논리로 변질시켜버린 것이다.
마치 이번 주 주일에 교회 가지 않으면 당장 지옥에라도 떨어질 것처럼 인식이 변질되어버린 우리들의 신앙 같다.

주님의 말씀과 인도하심에 내 나름의 논리를 적용시키는 것이 아니라 혼자 멋대로 생각하고 결정 내리는 것이 아니라
한 번 더 주님의 뜻을 구하고 주님의 시선과 말씀을 기반으로 주님의 의도를 파악하자.

2.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쪽 손 마른 사람이 거기 있는지라
손 마른 사람은 정말 부지런히 회당을 다녔던 것이다.
누구 하나 자신에게 눈길주는 사람 하나 없어도 자신의 기대와 고집을 가지고 언젠가 치유될 그날을 기대하며.
이 모습은 왜 꼭 날 보는 것같이 불쌍하게 느껴질까...
누구 하나 나에게 신경 쓰지 않아도 말 한번 걸어주지 않아도 꿋꿋하게 나의 할 일을 하며 걸어왔던....

다른 점이 있다면 이 사람은 마음속에 포기하지 않는 기대와 소망이 있었다.
그리고 그 기대를 포기하지 않고 꾸준하게 부지런히 자신만의 제사를 지낸 것이다.
그것이 그 사람의 꿈이자 절박한 희망이었겠지

나는 언젠가부터 그런 꿈을 포기한 채 미련을 버리고 있었다.
내 욕심이라며 내 욕심은 들어주지 않으시겠지... 하는 생각으로 혼자 멋대로 판단하고 버리며 살아왔다.
내 필요를 내려놓고 주님께 집중하라는 것은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떠나서 그냥 주님께 집중하라는 것이었는데..
내 욕심인 것을 떠나서 내가 주님께 집중하고, 그것이 나를 더 좋게 이끌어준다면 주님이 알아서 주실 것을
나는 안 들어주실 수도 있으니까 일찌감치 체념하고 다닌 것이다.
그런 영혼이 없으니 열정마저도 식었을 테고 애초에 믿음이라는 것 자체가 성립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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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해서 혼자의 시간을 보내게 해주시는 주님께 다시금 집중합니다.

내가 필요한 것을 포기하는 것이아니라

그것이 필요하지만 그것을 뒤로하고 그냥 주님께 집중합니다.

주님이 나에게 하시고자 하는 말씀에 집중합니다.

이끄실 곳으로 나를 이끄시고, 그곳으로 이끄시는 주님의 뜻을 정확히 분별하는 시선을 갖게 해주세요

주님의 말씀을 함부로 판단하고 결정해버리고 포기해버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시선으로 다시금 생각해보고 주님의 뜻을 구할 수 있도록 해주세요

나는 정말 나를 사랑하는걸까?

아니면 '열심히 살고자 발버둥치는' 나를 자랑스러워하는 걸까?

나의 모든 능력들이 사라진다면.... 더이상 개발을 할 수 없고 아무것도 할 수 없다해도 나를 좋아할 수 있을까..

아니 애초에 내가 나를 사랑하고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자꾸만 나 자신을 외부로부터 인정받는 것으로 나 자신의 가치를 인정하고 중독되어버린 탓일까?

 

날 사랑하기 위해서 뭘 해야하는건지

나 자신을 사랑한다는게 뭔지 모르겠다.

그러니 더더욱 나 자신을 사랑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것이 아닐까..

 

주님은 아무 기준 아무 조건없이 그저 내가 당신의 존귀한 자녀라고 말씀을 하시는데

아직 가슴으로 와닿지않은것인걸까

그게 가슴으로 오게 되면 날 사랑할 수 있을까...

묻고싶고, 알고싶다.

날 사랑한다는 감정이 어떤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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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2장 13~2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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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를 부르시다(마 9:9-13; 눅 5:27-32)

13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 나가시매 큰 무리가 나왔거늘 예수께서 그들을 가르치시니라

14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15 그의 집에 2)앉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3)앉았으니 이는 그러한 사람들이 많이 있어서 예수를 따름이러라

16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 및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17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금식 논쟁(마 9:14-17; 눅 5:33-39)

18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하고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말하되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19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느니라

20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21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기운 새 것이 낡은 그것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되느니라

22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자르다(마 12:1-8; 눅 6:1-5)

23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새 그의 제자들이 길을 열며 이삭을 자르니

24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말하되 보시오 저들이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

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다윗이 자기와 및 함께 한 자들이 먹을 것이 없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26 그가 아비아달 대제사장 때에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고 함께 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

27 또 이르시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28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1.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우리는 아프다는 것을 매우 인정하기가 힘든 마음을 갖고 살아가고있다.

그것이 육체적이건, 심리적이건.

육신이 병들었다는 것을 알았을 땐 매우 우울하거나, 발악을 하기도한다.

설령 그렇다하더라도 차라리 육신이 아픈 것이 났다. 

심리적으로 아프다는 것은 더더욱 알아채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특히 스스로 인지하기는 기적이자 축복과도 가까운 일이다. 더욱이 우리 한국이라는 나라는 심리적으로 아프다고하면 '내가 뭔가 이상한사람인가?'하는 자신의 가치를 무너뜨리면서 더더욱 인정하기가 힘든 시대이다. 결코 이상하지 않은데.... 그렇게 생각하는 내 자신이 가끔은 불쌍하기도 하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에게 '병든 자'를 비유하시며 죄인을 위하여 온 것이라고 하셨다.

자신이 죄인이라고 인정하는 일은 심리적인 아픔을 인정하는 것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그것보다 더 어려운 마음일지도 모른다.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는 일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고, 그것은 자신의 치부가 드러나는 일로 생각하니까. 그러니 '자신을 죄인임을 인정하라'는 말이 당연히 거부감이 드는 일이고, 어쩌면 반감을 사게 되는 말이기도 하다. 

 

그런데 주님은 과감하게 바리새인들에게 그 말을 던진다.

현시대적으론 새파랏게 어린 청년이 꼰대에게 싸움거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정확하겐 꼰대가 먼저 딴지(?) 시비(?)를 걸었지만..)

 

주님은 의인이 아니라 죄인에게 관심이 있음을 분명하게 표현하고 싶으셨던게 아닐까

그리고 그 죄인들에게 위로를 주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너와 내가 함께하겠다."

사회적으로 박해 받는 세리와 죄인들.

그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함께하는 것.

그러니 자신이 죄인임을 망설이지말고 인정함으로써 나아오라는 분명한 사인이 되지않았을까.

그리고 바리새인들에게까지도 그런 메세지를 담아 말씀을 하셨던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들을 귀가 있는 자들에게만 들렸을 메세지겠지?

 

죄앞에서 누구보다 냉정하게 자신을 바라보고, 솔직해져야함을 잊지말자.

 

2.허물을 벗은 신앙 :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기운 새 것이 낡은 그것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되느니라

낡은 옷을 아무리 새로운 천으로 덧대도 그 낡은 것은 가려질뿐 없어지지 않는다.

아무리 겉으로 '척'을 해봐도 민낯을 드러나게 되면 그 낡은 모습들, 죄의 모습들이 다 드러날것이고,

그게 아니더라도 눈썰미 좋은사람들에게는 가리는 것 자체부터 의미없는 것이다. 

결국엔 허영심 가득한 허세, 속빈 강정일 뿐인 것이고, 아무리 감춰봐야 얼마 지나지않아 그 실체가 드러나게 될것이다.

 

또 새 것이 낡은 그것을 당기어 헤어짐이 더하게 된다는 것은 아무리 자신의 낡은 모습을 감춰 속인다 하더라도

그 속임으로 인해 또다른 낡음을 낳게 되는 말씀임을 깨닫게 하신다.

결국에 아무리 열심히 철저하게 '척'을 해봐야 결국에 실체는 드러나게 되어있고,

누군가가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결국에 그 '척'들로 인하여 민낯이 드러나게 되어있음을 뜻한다.

 

나에게, 주님에게 솔직해야함을 잊지 않아야할것이다.

'척'하지 않는 솔직한 신앙을 간직하자.

 

3.본질 바로잡기 :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시험을 칠때는 출제자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해야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매순간 시험의 연속이다.

우리는 모든 상황과 모든 말씀속에 숨어있는 주님의 의도를 파악해야한다.

하지만 우리는 매순간 잊게되고, 그로 인하여 자꾸만 본질(주님의 의도)를 놓치며 살게된다.

주님이 주시는 시험의 의도를 바로 알게 되는 순간 그 시험의 공략법을 파악하게 되고, 더욱 주님을 의지하고 믿게된다.

 

어려운 시험을 격는다고해서 주님을 원망하기보다 먼저 주님의 의중을 여쭙는 시간을 가져보도록 하자.

주님의 의중 속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과 성장을 발견 할 수 있을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찾게 된다면 우리는 더욱 강인해지고, 더욱 자유로워지고, 더욱 기뻐하는 삶을 살게 될것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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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앞에서 무엇을 감출수 있을까요

모든것을 다 아시고 모든것을 다 꿰뚫고 보시고 다 보고계시는 분인데 감추려는 것 자체가 부끄럽습니다.

하지만 저는 인간으로써 또 자꾸만 아담과 하와처럼 숨으려 하고, 감추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 모든 죄악을 드러내시는 주님

그 죄를 빛가운데로 드러내시고 죄를 태워 나를 다시금 주님앞으로 인도하셨습니다.

나의 수치와 부끄러움을 드러내시고, 태우시고 주님앞으로 다시 나아올수 있게 되었음에 감사드립니다.

 

저의 인간의 본성에 의하여 다시 '척'하지 않는 신앙이 될거라고는 확신치 않고 오히려 저 자신을 믿기가 힘듭니다.

하지만 주님을 의지함으로 이겨나갈 수 있는것을 체험할 수 있었고, 이것을 잊지 않고 끝까지 의지할 수 있도록 주님께서 도와주세요.

솔직하지 않고 자꾸만 숨으려는 나 자신을 주님앞에 무릎 꿇려놓고 회개합니다.

오직 빛이신 주님을 바라봅니다.

 

매순간 주님이 주시는 시험 속에 주님의 의중을 여쭙고 참된 본질을 찾으며 주님을 의지하는 그런 신앙이 되게하시고, 그로 인해서 자꾸만 죄성이 올라와 감추려는 저 자신을 깨우치심으로 다시금 죄악가운데로 가지 않도록 주님께서 인도하여주세요.

 

감사합니다 주님.

난 예수를 믿어

그리고 인간이야

너네들과 다를거 없는 그냥 평범하지만 다른, 같은 하늘아래에 살아가는 한낱 인간.

 

어느날 친구가 나에게 물어봤어

"야 너네는 죄안짓고사냐?"

처음엔 이걸 왜물어보나싶었어

"왜 안짓고살겠냐 ㅋㅋ 나도 인간이야"

한참지나고나서 또 죄를 지었다는것을 깨닫고난 후의 나의 모습을 보면서 그 질문의 의도를 깨달았어

"니네는 뭐 다르냐?"

 

맨날 '거룩'을 외치면서 세상과는 다른 죄의 기준을 들먹이며 미련하고 답답하게 살아가는 나에 대한 호기심이었을거야

'왜 저렇게까지 피곤하게 살지?'라는 마음도 있었겠지

뭐... 예수를 모르는 사람들이 가장 납득하기 쉽게 설명을 하자면

나는 지금까지 이렇게 살아왔고, 지금까지 살아온것처럼 앞으로도 이렇게 살아가는게 덜 피곤해.

이렇게 살아온 나에겐 이게 더 익숙하거든.

맨날 풀만 먹는 초식동물에게 고기는 관심이 없는것 처럼.

미련하다고 할 수 있어. 하지만 나에게 이것이 내 건강의 방식이고, 살아가는 방식인거지

 

이젠 나는 이렇게 대답할거같아

"나도 니네처럼 팔다리 붙어있고 눈코입 붙어있는 인간이야 ㅋㅋㅋㅋ 다를거없고 나도 죄지으며 살어,
 그럼 넌 궁금할거야 뭐가 다른건지. 니네시선에서는 죄가 아닌데 괜히 죄로 만들어서 피곤하게 사는거 아니냐고

 뭐....그런걸수도있겠지 하지만 내가 봐온 선배들은 하나같이 이런 삶의 방식을 통해서 건강하고 강인한 멘탈갖고 있더라

알고보니 그 건강과 강인함은 예수였어.  난 그런 건강과 강인을 배우고싶어. 그외의 것들은... 내시선에선 매우 연약해보여

니 마음속에는 니가 있고 내 마음속엔 예수님이 계셔.

니가 진심으로 사랑하고 존경하는 분이 니네 집에 방문을 했는데 초라한 모습으로 모시고 싶겠어? 최고의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겠지 그러니까 실수하더라도 최선의 마음으로 예수님을 모시고있는 내마음을 꾸미는거야 그렇게 교제하려고"

 

난 인간이야

죄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그저 한낱 인간.

육신, 정욕, 물욕에서 벗어날 수 없는 그저 인간 한명.

그리고 나또한 매일 죄를 지으며 살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일도 죄로부터 멀어지는 훈련을 재도전할거야

실패할것을 뻔히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도전을 할거고

넘어질것을 당연히 알고있지만 또다시 부딪힐거야.

나는 죄 많은 인간이지만 죄가 많은 인간이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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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언제나 우리의 '주님'을 우리 속에 가두곤한다.

매우 역설적이다.

우리를 이끄는 '주인'이자 우리를 계획하시고 돌보시는 '부모'인데 나의 울타리 속에 가두는 것이다.

우리가 바라는대로 미래를 계획하고, 그렇게 되지 않으면 실망하고 원망하고...

 

더 지나고나서 그 계획된 미래의 어긋남이 감사로 변한다면 그나마 다행일것이다.

하지만 계획의 어긋남은 실망과 원망으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느꼈다..

특히 그 시나리오에서 자신의 모습에 아직 미련이 남아서겠지.

그 미련을 버리고 현재에 만족한다면 더 아름다운 세상을 보게 될것이다.

 

인간의 시야는 매우 좁다. 그 인간이 경험하는 세상 또한 매우 좁다.

매우 제한된 영역 내에서 삶을 살아가고, 그 제한된 세상만을 경험하며 살아간다.

그러다보니 내가 보는 주님의 영역 또한 매우 좁아지는 것은 아닐까

더 큰 세상을 볼수록, 더 많은 경험을 할 수록 내가 볼 수 있는 주님의 영역은 더 넓어지겠지.

 

그렇게 멋대로 정의내리고 판단해버린 우리의 주님은 그 예상을 처참히 깨뜨리시곤 전혀 다른 시나리오의 전개를 펼치시곤 하신다.

 정말 교만중의 교만이다.

나의 주인, 나의 인도자라고 고백하면서 내가 주인이되려 하극상하는 꼴이라니...

물론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전혀 모르고 저질러버리는 짓이긴 하겠지만.

 

그렇게 새로운 꿈을 마음에 새긴다.

이런 교만을 범하지 않기 위해서...아니

더 큰 주님을 경험하고 그 주님과 더 깊은 교제를 하기 위해

더 큰 세상을 체험하고, 더 많은 경험을 내 인생에 담아야 할것이다.

더 큰 주님을, 더 많은 주님을 경험하러 세상으로 뻗어 나가자.

더 큰 세상을 체험하고, 더 많은 일을 경험하고,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 다른 시각의 세상을 엿보기도하고.

더 깊은 주님을 체험하자. 

 

함께 가자

스키탈 때의 집중해야할 것은 나무가 아니라 길 이어야한다.

스키를 탈때 나무에 집중하면 절대 나무를 피할 수 없고

그 숲의 길에 집중하기 시작하면 놀랍게도 길이 보일것이고 나무는 알아서 피할 수 있게 된다는 말이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동일하다고 느꼈다.

인간의 '뇌는 부정을 이해할 수 없다'는 연구결과처럼

'생각 하지말자'이라고 결심하면 청개구리처럼 그 생각이 더 강렬하게 올라온다.

그냥 그것을 받아들이면 잠잠해지고, 그 생각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다.

 

우리가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 죄를 분석하기보다,

주님께로 생각을 더 집중하기 시작하면 더이상 죄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있다.

우리가 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유일한 공략법, 그것은 우리가 주님께로 집중 하는 것이다.

 

이미 저지른 죄에 대해서는 안타깝지만 돌이킬 수는 없다.

그 실수를 피드백으로 삼고 미래에 집중해야한다.

상황은 바뀌지않을것이기 때문에. 하지만 내 마음은 변화할 수 있다.

우리가 주님께로 집중하기 시작한다면 더이상 죄는 우리의 짐이 되지않고 자유로울 수 있게 되는것이다.

 

머리속에서 자신을 괴롭히는 과거의 실수가 있다면 받아들이자.

죄로부터 눌리지말고 인정과 사랑으로 맞서야한다.

인정은 "그래 나 잘못했어. 그러니까 지금의 나는 더더욱 주님께 집중을 할거야"

사랑은 "그럴수있어. 괜찮아. 우린 인간이야 지극히 정상이고, 주님은 그런 모습마저도 사랑하시는 분이셔 나도 나를 사랑하자."

(또 실수한 대상이 있다면 그 대상에게도 진심으로 사죄하고, 그 사죄하는 마음으로 같은 실수를 범하지 말아야할 것이다.)

 

내 사랑아 죄에 눌리지 말거라. 너의 죄는 내가 다 가져갈테니 죄에 눌리지 말거라.
내 자녀야 나는 그런 너의 모습도 이해하고, 사랑한단다. 그런 너를 내가 만들었잖니
내 아들아 내 딸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는 나의 사랑하는 자녀란다.
죄의 기억은 떨쳐내고 나와함께 자유하지않겠니?
쉽지 않은것 안다. 하지만 나와함께라면 무엇이 어렵겠니 내가 다 해결해줄텐데
걱정하지말고 나에게 맡기거라
너가 어디에있건, 무엇을하건, 무엇을 먹건, 무엇을 듣건 너는 내 자녀고, 사랑중에 사랑이란다.
그러니 너는 나와 함께 하는것에만 집중을 해주었으면 좋겠구나.

 

그렇다. 죄를 내가 감당할 수 있다고 믿는것, 책임질 수 있다고 믿는 것부터가 교만이었다. 

죄는 내가 감당할 수 없다. 책임질 수도없다. (물론 현실적인 뒷감당은 내가 하겠지만..)

죄에대한 책임을 주님께 맡기고 나는 그저 주님께 집중하자.

내가 할일은 그것뿐이다. 주님께 집중하고, 나의 할일을 충실히 수행하는 것.

나의 필요는 주님이 알아서 다 해주실것이다. 

그러다보면 나는 알아서 성장할테고, 견디다보면 주님이 풀어주시리라 믿는다.

오늘을 살자. 더 밝아질 내일...그언젠가를 기약하며

그렇게 다시한번 가슴에 오지않는 천국소망을 꿈꾼다.

 

누군가가 강연에서 이 말을 했던 것을 다시한번 되새긴다.

"나의 시선과 시각과 시점을 주님께로 맞추면 주님의 때가 시작이 된다"
-[이준희 대표]의 더크로스처치 일터특강-

나의 시선과 시각을 주님께로 맞추고, 주님의 때를 기다리면 주님의 역사를 체험할것이다.

 

김명선 간사님의 시선이라는 곡을 더 깊이 체험하는 묵상의 시간이 되었다.

 

또 생각이 올라올것이다. 나는 벗어날 수 없다. 인정하고 받아들이자. 차라리 대화를 하자.

나에게 강하게 밀어붙이기보다 사랑해주고, 보듬어주자.

그리고 이해하자....용서하자. 사랑하자.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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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에게 좋아보이기위해 괜찮은척 했다.
괜찮아보여야했다.
아무렇지 않아 보여야했다.
힘들지 않은척
슬럼프에 빠져도 빠지지않은 척
또 나 자신에대해 솔직하지 못했고, 나와 내 주변을 속이고 있었다.
이유는.... 소중한 사람을 잃기 싫다는 욕심과 두려움이 아닐까
그렇게 또 다시 속인 결과는... 처참했고, 절망이었다.
그 두려움이 모든것을 앗아갔고, 또 다시 지옥을 보게 한것이다.

왜..나는 나 자신에게 솔직하지 못할까
내 마음이 병들어가는 줄도 모르고 방치한채로....괜찮다고 생각한 것일까

 

"잘 지내고있냐?"

누군가가 형식적으로 물어보는 안부를

형식적으로 넘기지말고 진지하게 성찰을 해보라는 신호로 인식하자.

난 정말 잘 지내고 있는 것일까?

 

괜찮아?

무심코 던지는 이 말 한마디가 큰 위로가 될 때가 있다.

평소에는 괜찮은 척 바쁘게 살아가다가

괜찮냐는 한마디에 울컥 울음을 터트리고 만다.

사실은 전혀 괜찮지 않았던 것이다.

 

평소에는 무심코 넘겼을 그말이

그 한순간에 그동안 괜찮지 않았던 것을 깨닫게 해준다.

그동안 너무 무거운 짐을 메고 살아왔던것을.

너무 큰 부담감을 감당하고 있는 모습까지도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것을 알아차리기에는 너무 많은 시간이 걸린다.

탈진해 쓰러지기 직전까지 기다려야하니까

그전까진 자신마저도 그 상태를 알아차리긴 어려울테니까

 

하루를 마치고 안식처에 들어와

누군가는 맥주 한 잔,

누군가는 따뜻한 물에 몸을 맡기고,

누군간 침대 속에 파묻혀

그 하루를 감당하기 위해 무장했던 긴장들을 모두 털어내며

자신에게 되묻는다.

"오늘 하루는 어땠어? 괜찮아?"

단순히 "오늘 하루도 고단했다..."로만 끝내버릴 것이 아니라

이것은 이랬고, 저것은 저랬으면...하는 배움으로 만들자.

 

그리고 괜찮지 않다고 느낄땐 더 솔직하고, 민감하게 느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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