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5.15 주일 설교 (재물이 많은 고로)

17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새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19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속여 빼앗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20 그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나이다
21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22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으로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막10:17-22)

예수께서 길로 나가셨다. 길을 나서셨다.

마가복음 8장 27절~10장 52절이 길에서 길로 끝난다고 해서 "길 단락"이라고 불린다.
바디메오는 길에 있었다. 길에서 자신의 장애의 치유를 간곡히 부르짖고 있었다.
그에겐 가진것이 없었지만 간절함과 믿음이 있음으로써 죄사함을 받고 치유를 받은 것이다.

1.겸손했던 청년
본문에서 나오는 청년은 세상적으로 성공한 청년이다. 하는 사업이 잘되고 있었고, 승승장구하고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가진것에 미련을 가져 내려놓지못하고 슬픈 기색으로 다른 길로 돌아서게 된것이다.
그 청년은 나름 겸손한 이였다. 그 증거는 "달려와서 꿇어앉아 묻자오되"에서 확인할 수 있다.
자신이 세상적으로 매우 승승장구 하고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달려온것이다.
성경 전체에 아울러 누군가의 앞에 꿇어 엎드렸다는 내용이 그리 많이 나오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달려와서 꿇어앉아" 즉 꿇어 엎드렸다는 것은 자신이 상대방을 굉장히 존경하고있다는 것을 엿볼수있다는 것이다.
그런 존경하는 대상이 모든것을 버리고 자신을 따르라고 했을 때, 그 세상 모든 것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슬픈기색으로 다른 길을 택한것이다.

2."니가 선함이 뭔진 알긴해?"
18절에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라고 하심은
"니가 진짜 선함이 무엇인지 알기는 하냐?"라고 재해석이 가능하다.
또 예수님이 후에 부가적으로 진짜 선함이 무엇인지 말씀하신다.

  • 살인하지 말라
  • 간음하지말라
  • 도둑질하지 말라
  • 거짓 증언 하지 말라
  • 속여 빼았지 말라


이중에서 속여 빼앗지말라는 십일조에 언급이 되어있지 않은 내용이다.
비슷하게 남의 것을 탐내지말라, 거짓말하지말라는 내용은 있으나 속여 빼앗지말라고는 직접적으로 언급되어있지 않다.
예수님께서 재해석하신것이다.
그이유를 추측해보면 "니가 재물을 가지고잇으니 더 많은 재물을 탐낼수있으니 주의해라"?
아니면 청년이 숨기고있는 죄악을 예수께서 인지하시고 은근슬쩍 지적하는 것일수도 있지 않을까

3.나야 세상이야?
예수님이 모든것을 버리고 자신을 따르라고 한것은

재물과 하나님 둘 모두를 섬길수 없으니 둘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뜻으로 해석한 것이겠지.

4.청년의 이름의 행방
본문에 청년의 이름은 언급되지 않는다.
다른본문에서도 이름 대신에 청년, 관리로 언급되고있다.
성경에서는 이름을 언급하는 것은 그 인물이 비중있게 다루어지는 중요한 인물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청년의 이름은 아무도 알지 못한다. 이 글을 쓴 저자는 이름을 기억하지 못할만큼 스쳐지나가는 인물이지만 기록에 남았다는 것은 "이름 모를 청년을 향한 안타까움"일까

결론
내가 예수님말고 외에것을 선택하고 있는 그 외의 것이 무엇일까?
예수님을 선택하지 못하게 만드는 그 무엇이 무엇일까?
재물?사랑?정욕?꿈?커리어? 모르겠다.......
내가 청년처럼 영생을 버리고 슬픈기색을 띄고 다른길로 나서게 만드는 무엇을 알지못하겠다...
그냥 "영생"자체를 의심하는것은 아닐까?


예배 후 개인 묵상

忘戰必危(천하수안) 전쟁을 잊으면 반드시 전쟁이 온다.


그렇다. 나는 천국을, 영생을 기대하지않았던 것이다.
영생을 믿지않고 천국소망을 원했지만 천국은 믿진않았던 모순적인 생각을 하고있었던 것이다.
나자신을 위해, 내가 살기위해 예수를 의지했던것이다.
그렇다고 이것을 쓰고잇는 지금도 그런생각이 변하진않았다.
다만 서서히 변하리라 믿고 확신한다.

처음엔 이것이 무엇이 문제인가 했다.
나를 위해 주님을 의지한다는것이 뭐가 문제인지 몰랐다.
힘들때는 전혀 문제되지않는다. 힘드니까 힘들어서 주님을 더욱 의지하고 찾게될테니까
그런 마음이 힘들지 않다고 느낄 때는 주님을 찾지 않게 되는것이 문제였다.주님을 전혀 의지하지 않는것이다. 힘들지않으니까....그러고나서 또 힘들어지면 "나 힘들어요"하고 달려가서 징징대는것이다.

나는 예수님을 인격적인 만남을 통해 영접을 경험했고, 지금도 그분이 내 마음 속에 살아계심을 의심치않고, 사랑한다.
하지만 열정이 식은것이다. 그분을 향한 온도가 힘들땐 뜨거워지다가 또 평화로울땐 차가워진다.

더 심각한 것은 그런 모습이 내 자신 뿐만이 아니라 내 주변까지도 영향을 미치게 되는것이다.
관계로 이어진 열의 전도성에 의해 나의 신앙의 온도가 주변까지 퍼지는 것이다.
그 관계가 깊으면 깊을수록 그 현상은 더 빠르며, 걷잡을 수 없다.

나의 신앙의 디딤돌 하나가 잘못 놓임으로써 내가 쌓아올린 신앙이 무너져 내리고 그 주변에 함께 하고있는 동역자들에게까지도 파편이 튀어 버리는 것이다.
가까울수록 더더욱 큰 피해를 입게 될것이다.

너무 늦게 알아차려버렸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알아차린것에 감사한다.

지금이라도 돌이킬수 있음에.... 많이 아프지만 아픈만큼 또 배워간다.

 

누군가 덕분에 주님을 보게 되었지만

그 누군가와 주님은 그 누구때문에 주님을 바라보기보다 주님과 나 자신을 위해서 주님을 보길 바랬을 것이다.

그러니 이제부터 나 자신의 진짜 건강을 위해서 그 관계를 다시 쌓아 가보려한다.

그러니 이제 다시 "나자신"과 "주님" 이 해야함을 느꼈다. 나자신과 주님을 먼저 알아가보자

이 외의 모든 일들은 그 다음부터 해보자. 어떻게든 어떤 방향으로든 흘러가겠지..

 

오늘의 이 묵상과 곁들여진 바디메오 이야기로 생각나는 찬양이 있다.

 

 

다시 한 번 외쳐 부르니 예수여 나를 돌아 보소서
어둠 속에서도 빛을 비추시는 예수만이 내 소망
다시 한 번 내 삶 드리니 예수여 내 손 잡아 주소서
폭풍 속에서도 주가 붙드시니 예수만이 내 생명
브리지임팩트 프레이즈 - 다시 한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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