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머 베절릴 헐버트 (Homer Bezaleel Hulbert, 許轄甫 허할보)

(한국어 이름 : 헐벗, 흘법, 허흘법, 할보, 허할보)

1863126~ 194985

미국의 감리교회 선교사, 육영공원 영어교수(한국 최초 근대 명문귀족 공립학교), 항일운동가.

 

 

고종으로부터 을사늑약의 무효친서를 헐버트 선교사에 전달하고 세 번의 특사를 받을 만큼 영향력 있는 항일 운동가였던 그는 고종의 최측근에서 보필과 자문 역할과 서방 국가들과의 외교 및 대화 창구 역할. 헤이그 비밀밀사 지원에도 적극 동참. 한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외국인 1인으로 당선. 안중근 의사에게 존경받는 인물.

 

1863126일 미국 버몬트주 뉴헤이번에서 태어남.

아버지(캘빈 헐버트) : 미국 버몬트 주 미들베리 대학교 총장 칼빈 헐버트 목사님,

어머니(메리 우드워드 헐버트) : 다트머스 대학교 창립자, 인도 선교사의 자녀.

자녀 : 32

 

 

1886(고종23, 한국나이 24)

주변 열강국가들의 압박으로 불안하기 시작한 조선은 미국에 육영공원에 교사를 파견해달라는 요청으로 길모어와 벙커 등과 함께 조선에 입국하여 영어를 가르치기 시작함.

그는 자비로 한글 개인교사를 고용하여 한글을 배워 3년 만에 한글로 책을 저술.

 

1888(26)

제중원 학당에서도 교직을 담당하기 시작함.

9월 미국으로 잠깐 귀국하여 메이 한나와 결혼 후 다시 조선으로

 

1890(28)

일제의 침탈 행위를 목격하여 조선의 국내외적으로 관심가지며 자주권 회복 운동에 헌신하기 시작

 

1891(29)

최초의 순 한글 지리사회 총서 교과서 <사민필지> 저술

한글을 극찬하며 한자보다 한글 사용을 독려

여름에 아펜젤러 선교사님과 모펫 선교사님 동행하여 선교 정보 수집을 위한 평양 방문

(평양에서 석탄 광산의 실태 파악)

재정문제로 육영공원 축소 운영에 의해 교사 사임 후 미국 귀국

 

1893(31) - 선교의 시작

고국 귀국한지 2년 만에 미국 감리교회 소속으로 선교사 파송 준비과정을 마치고 다시 한국 복귀하여 선교활동 본격 시작.

감리교 출판부(삼문출판사) 책임 담당.

배재학당에서 학생들을 가르침

 

1895(33)

2년간 휴간했던 영문 월간지한국소식을 다시 발행 시작

영문 소설 텬로력뎡을 한국어 번역판 최초 출판.

108일 을미사변 때에 언더우드와 에비슨과 함께 고종의 침전에서 불침번

1896(34)

장남(쉘던 헐버트) 출생

1897(35)

아들(쉘던 헐버트) 병사

5월 조선정부와 고용계약으로 학생 수 50명 되는 한성사범학교의 책임자

관립영어학교에서 영어 교사

정치적으로는 고종을 최측근에서 보필, 자문역할과 호위역할을 병행

또 외교의 대화 창구 역할. 고종의 가장 신뢰받는 외국인중 1

 

1900 ~ 1905(38 ~ 43)

고종의 특사로 미국 방하기 전까지 중학교 교사 신분으로 학생들에게 일본의 부당성을 지적하는 사회활동 전개

 

1901(39)

영문 월간지 <Korea Review> 발행

 

1902(40)

<한글 (The Korean Alphabet)> 논문 저술

금속활자, 거북선 등에 대한 한국 문화 관련 논문 발표.

대표적으로 <대한제국 멸망사 (The Passing of Korea)>

 

1905(43)

대한제국의 외교권 강탈하는 을사늑약 사건 후 이 늑약에 대한 불법성과 무효성을 국제사회에 알리기 위한 노력과 동시에 자주독립을 주장

을사늑약이 무효하다는 고종의 친서를 미국의 대통령에게 전달하려 했으나 실패.

하지만 그 외의 열강국가들에게 그 부당함을 알렸음.

 

1907(45)

고종의 밀서를 받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장에 비밀 특사 파견에 큰 공헌을 함으로써 제4의 특사로 불림.

이 일로 일본에서 헐버트의 활동을 알게 되고 조선에서 추방하게 된다.

하지만 미국에서도 서재필과 이승만 등 미주 독립 운동가들에게 적극 지원

미국 각지를 돌며 일본제국의 만행을 퍼트리고 한국의 분리 독립성을 호소

7월 헤이그 평화클럽에서 일본의 부당함을 질타 후 미국으로 귀국

 

1908(46)

미국 매사추세츠 주 스프링필드에 정착, 스프링필드 훼이스 회중교회에서 목사 안수

미국 전역과 전 세계의 각종 회의와 강좌에서 일본의 만행을 규탄하며 한국의 분리 독립에 관한글 저술

 

1918(56)

파리 강화회의를 위한 독립청원서를 여운홍과 함께 작성.

1919

3.1 운동 후에는 이를 지지하는 글을 서재필이 주관하는 잡지에 발표

미국상원 외교위원회에 일본의 만행 고발

 

1942(80)

워싱턴D.C에서 열린 한국자유대회에 참석

(1919년과 1942년 미국에서 개최되었던 독립운동후원대회.)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15170

 

1944(82)

한국무제연구회에서 간행하는 한국의 소리라는 책자에선 루스벨트 대통령이 을사늑약 직후 고종황제의 청을 받아들이지 않아 동양의 역사가 바뀌었고, 미국이 친일 정책을 썼기 때문에 태평양 전쟁이 일어났다고 주장

 

194985일 소천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한국은 독립되었고, 48년 대한민국이 수립된 다음 해(42년만) 방한.

방한 후 1주일 후 병사.

811일 최초로 외국인 사회장으로 연결식을 거행 후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묻힘.

(그의 첫째 아들 쉘던이 2살 때 사망하여 이미 양화진에 묻혀있었음)

헐버트는 샌프란시스코에서 한국으로 떠나며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땅에 묻히길 원하노라.”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의 두 가지 소원은 통일된 한국을 보는 것 고종의 내탕금을 찾는 것

(내탕금 : 임금의 개인 재산을 관리하던 기관)

 

195031일에 대한민국 정부에서 외국인 최초로 건국공로훈장 태극장(독립장)을 추서.

전 대한매일신보 주필로 지냈던 영국인 어니스트 베델과 함께 조선 말기 '조선을 구하기 위해 활동한 대표적인 서양인'으로 손꼽히며,

오늘날 대한민국에서는 한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외국인 1위로 꼽히기도 했다.

2014109일에 한글 보전과 보급에 헌신한 공로로 대한민국정부에서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했다.

 

 

[출처 :

https://ko.wikipedia.org/wiki/%ED%98%B8%EB%A8%B8_%ED%97%90%EB%B2%84%ED%8A%B8]

 

 

 

 

부인

이화학당에서 음악을 가르침.

외국인 자녀들을 자신의 집에서 가르침.

제중원에서 환자들을 간호함.

볼드윈 교회(, 동대문교회)에서 담임 목회

헐버트 선교사님과 함께 외국 서적의 번역작업과 외국 홍보활동, 기사 번역 작업을 함께 함.

1908년엔 제자 오성근과 함께 <대한역사>라는 한글 역사 교과서 출판.

하지만 1년 후 일제에 의해 모두 몰수되어 불태워졌다.

 

업적

육영공원에서의 교직생활

조선으로부터 영어 교사를 파견해달라는 요청에 의해서 첫 입국.

 

고종의 독립자금을 위한 비자금 추적 (1909)

그의 죽을 때 까지 이루지 못했던 그의 소원이자 고종의 명령.

조선에서 일본의 부당한 식민 지배를 세계에 알리고자 헤이그 특사를 파견 했을 때, 일본에 이 계획이 발각되어 실패되고, 일본에서는 이를 문제 삼아 고종을 황제에서 폐위시킨다.

고종은 독립운동을 위하여 비자금으로 독일의 상하이 주재은행에 예치해둔 금, 현금 (242,500) 대신 찾아 달라고 헐버트에게 요청한다.

하지만 헤이그 특사 이후 독립운동을 압박하기 위하여 추적하던 일본에게 먼저 발각되어 서류조작을 통해 일본에서 먼저 인출 해버린 뒤였다.

 

한글의 전파의 노력과 헌신

조선의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하여 한글을 배웠던 헐버트는 한글의 우수성을 깨닫고 한글전파에 많은 업적을 남기기 시작했다.

그중 하나인 최초의 한글 교과서(지리) <사민필지>

<한글 (The Korean Alphabet)1,2> 논문 저술

그의 저서 The Passing of Korea(대한제국 멸망사)는 조선 말기 3대 외국인 기록 중 하나로 꼽힌다.

 

한글의 띄어쓰기 시작

헐버트 선교사님은 서재필 선생님과 주시경 선생님과 함께 독립신문 창간

독립신문은 한글의 띄어쓰기를 시작하고 적용했던 최초의 한글 신문.

주시경 선생님과 함께 한글을 연구하다 띄어쓰기와 마침표 찍기 도입

문자사에서 한글보다 더 간단하게 더 과학적으로 발명된 문자는 없다.’라고 <The Korean Alphabet ||>논문을 통해 한글을 극찬(1892)

이외에도 여럿 논문 저술

 

해외에서 한국이 처한 현실을 전파

교육자이자 언론인이고 했던 그는 한글로 된 교과서 외에도 영문으로 된 '한국의 역사''대한제국멸망사(The Passing of Korea)' 등을 통해 미국 대중들이 한국을 이해하고 도울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

고종의 특사로 해외파견 2

(1.고종에게 을사늑약이 무효라는 내용이 적혀져있는 고종의 친서를 받아 동맹국인 미국의 대통령(루스벨트)에게 전달을 하려했지만 미국은 당시 친일 분위기로 만남의 요청이 무시당함.)

 

<대한제국 멸망사>를 읽다보면 당시 조선인보다, 현재 한국인보다 우리나라를 더 잘 아는 외국인이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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